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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장소멸의가장큰이유는교통의발달이다.교통이발달하고먼곳까지이동이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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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사람들은화양장보다홍성장을많이찾게되었다.화양장은물건종류도다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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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물건값도홍성장보다비싸므로주변사람들로부터외면받기시작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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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화양장이 소멸한 이후로 1980년대까지 이곳에서 대장간을 운영했다. 또한 이


곳에서 만든 물건을 홍성과 광천의 철물점 등에 납품도 했다. 하지만 현대화의 물결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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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대장간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농기구들과 가격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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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이 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운영하던 대장간과 철물점은 1980년대 이후
로문을닫고말았다.
지금도대장간과철물점건물은텅빈채그대로남아있다.대장간의여러기구들은고물
상에넘겼고주요물품들만그자리에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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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화양장터는 홍성군 소유로 되어 있다. 홍성군과 지역주민들은 화양장터를 지역주
민들이 불하받도록 여러 번 시도했다. 홍성군은 화양장터를 공신력 있는 기관에 용역을 주
어 가격 감정도 실시했다. 아쉽게도 그때마다 주민들끼리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아서 성사
되지않고있다.
참고로 1993년에 발간된 홍성군지 증보판 「홍성지방의 시장 발달사」(李憲昶, 경기대학교 경
상대학부교수) 편에기록된화양장터의모습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화양장은 1955년에 금마면 화양리 신촌마을에 화양장이 개설되었다. 신촌마을과 죽림
리 사이에 있는 장고개 부근인데, 금마지서와 소방서 건물이 있는 도로변 주변이다. 이곳을
화양장또는신촌장이라고불렀다.
당시 조사 내용에 의하면 내기와 신촌의 유지 십 명 정도가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하여 장
시의 개설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내기에서 정미소를 경영한 정승해(鄭承
海)와농지개혁전에죽림리의대지주인윤남희(尹南熙)였다.
화양장의 건립에 동의하는 도장을 마을마다 받은 것으로 보아 정식으로 인가를 받으려
했던 것 같다. 천여 평의 부지에다 장옥 9동을 건립하였다. 화양장은 홍성(1·6일)과 삽교(2·7
일) 사이에 있고 예산(5·10일)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한 데다가 광천장날(4·9일)도 피해야 하
기 때문에 3·8일로 장날을 잡았다. 장터 부근에 사는 우차(牛車) 운수업자 이태근(李泰根)에
의뢰하여장날에상인4~5명이주문한물품을새벽일찍부터홍성으로부터운송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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