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83페이지

724페이지 본문시작

광천으로 이사 온 것은 1957년도이다. 오천에서 1955년도부터 조선일보 지국을 운
영했는데 250여 부의 구독자를 모았다. 당시에 천북, 주포, 오천이 주요 관할 지역이었
는데 상당한 실적이었다. 그의 신문지국 운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충청남도 책임자로부
터 부탁을 받고 구독자가 저조한 조선일보 광천지국을 맡게 되면서 광천에 터를 잡게
되었다. 광천지국을 맡으면서 장곡, 결성, 은하, 서부까지 관할했다. 당시에 조선일보 신
문 구독자를 600부까지 확보했다. 또한 천안부터 온양까지 각 지역 조선일보지국들을
규합하여 ‘조일회’를 만들고 회장도 역임했다. 조일회 산하에 모두 114개 지국이 회원
으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 옹암포구는 서울 장항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해로와 육로의 교통조건을
모두 구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까지 번성을 누리던 결성해안 주변의 상권은 점차
철길을 따라 옹암포와 광천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광천과 옹암포가 일제강점기에 번
창하던 제1전성기였다. 옹암포구의 제2전성기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다. 이 시
기는 옹암포구의 토사 유입과 조류의 영향으로 배를 정박시키는 곳이 점차 보령시 청소
면의식마을로옮겨가던시기이기도하다.
당시 비록 부두는 의식마을로 내려갔지만, 옹암포구는 여전히 장보러 오는 도서 지역
사람과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찾아들며 사람들로 북적였다. 의식마을 주변에 배는 정박
시켰지만 포구의 기반시설이 없기 때문에 옹암리로 와서 숙박하고 광천장을 보러 갔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 중반에 부두가 오천으로 옮겨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천에 배를 정박시키고 광천장을 보러 오는 도서 지역 사람들이 많았다. 옹암리 주변으
로와서숙박을해결하고광천장을보러가곤했다.
광천 지역은 당시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물가가 쌌다. 기차역이 생기면서 교통이 편리
한 광천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가가 싸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물가뿐만이 아니라 가축 값도 광천장이 쌌다. 소나 돼지 거래도 값이 싼 광천에
서 많이 이루어졌다. 광천은 온양부터 장항까지 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대흥, 광시, 비
봉,청양등에서도광천으로장을보러올정도였다.
722 홍성군

724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