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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한 것은 내륙 읍성과는 다른 수군진성의 특징적 현상으로 파악되고 있
다. 또 중종대에 수군진에도 내륙의 읍성과 같이 축성을 했다는 것은 이제 수
군이 유사시 해상전투뿐 아니라 육상전투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바다와 접하는 곳에 성벽을 구축한 수군진성의 특징은 해상과 육상
전투의 기능을 겸할 수 있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양란이후 이설·신설된 곳 중 안흥진을 제외한 평신진과 마량진은
전투용 성벽을 축조하지 아니하고 영사(營舍)만을 건립하고 운영되었는데, 이
는 유사시 강도방어를 위한 지원 부대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바
다에서 육지로 침입하는 형태의 왜구에 대한 방어책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3)오늘날지명의흔적
오늘날 각 수군진에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약간의 성벽 유적이 남
아 있을 뿐이고, 다른 유적이나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서천포와
평신진의 첨사비 몇 개와, 보령 오천의 충청수영 본영에 홍예문, 진휼청, 객
사, 계금장군청덕비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수군진이 설치되었던 곳은 지
명을 통해서도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수영이 있었던 곳인 보령시 오천은
조선시대에는 시장(市場) 명칭이‘水營場’이라고 불리고 모든 기록에도 수영
장으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지명을 통해서 수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으나, 1901년 오천군(鰲川郡)이 설치되면서 수영이라는 공식 명칭이 오늘날은
전혀 사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지명도 없어 현재는 지명만으로
는 수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일부의 고로(古老)들은
아직도 오천장을‘수영장’이라고 부르고 있음이 확인된다. 수영 남쪽의 고만
338!충청수영(忠淸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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