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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문화인물
태조 이성계의 스승
무 학 대 사
무학대사는 인지면 애정리 출생이라고
학 학( )인 무학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전한다. 그는 고려말 조선초기의 역사의
18세가 되던 해에 송광사 소지선사에게
격동기를 살다간 인물이며, 태조 이성계의
출가하여 이후 용문산 혜명국사에게
스승으로 그 이름이 높다. 무학대사와
사사를 받았다. 이후 수행에 정진하면서
관련된 설화들이 많은데, 특히 서산
부도암, 묘향산 금강굴에 머물렀다. 27세
지역에 이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하고
때에는 원나라에 유학하여 연경에서
있다. 학돌재는 무학대사가 탄생한 곳
지공화상에서 사사받고, 이 와중에 나옹
이라고 전하며, 학바위는 학이 무학대사를
선사를 만났다.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품고 있었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머물고 있던 나옹선사를 찾아가고 또
무학대사는 1327년 고려 충숙왕 14년에
다시 신광사에서 나옹선사를 만났다.
태어났다.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무학
35세인 공민왕 10년(1361) 나옹선사와
대사의 아버지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혔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도를 닦았다. 47세
었다. 군수가 그 부인을 관아에서 불러
에는 처음 출가하였던 송광사 주지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관아에
하게 되고, 나옹선사가 의발을 전해주
도착하여 군수가 얼굴빛이 창백하여
었다. 이는 선종에서 법을 전하는 표징
물은 즉 관아에 오는 도중 아이를 낳아서
으로 이를 통해 확실한 사제지간이 된다.
그렇다고 했다. 군수가 아이를 어떻게
지금도 지공화상, 나옹선사, 무학대사
했냐고 물었고, 그리하여 급히 아이낳은
3화상의 탱화가 그려지게 된 이유이다.
곳을 가 보았더니 학이 아이를 품고 있었
50세에는 나옹선사가 회암사로 초청을
다고 하여 이 아이 이름을 춤출 무( )
하게 되고, 수좌가 된다. 58세인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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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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