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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재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태의 이수를 올렸다. 비신은
화강암을 이용했는데 높이 186㎝, 너비 53㎝, 폭 45㎝로 4면
전체를 음서하였으며, 팔작지붕형태를 띤 이수는 화강암으로
처마의 반전이 있다. 1826년에 김홍익의 5대손인 김민주(?
)가 건립한 것으로 김재찬(?
)이 찬하고, 김노경(??
敬추사 김정희의 부친)의 글이며, 이조원(
)이 전서를
썼다.
김홍익(?
1581~1636)은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익지
), 호는 묵재( )이다. 앞서 살펴본 학주 김홍욱의 장
형이다. 1632년 연산 현감으로 재직 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 태종이 침입하자 인조는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하고,
전국에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김홍익은 쌀섬 위에서 군대를
김홍익 신도비
지휘하면서 격전 끝에 10여명의 적을 살해하였으나, 불행히
도 칼이 부러졌고 적진에 들어가 분전하다 결국 전신에 칼과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충절을 기려 정문을 세워 주었으며,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민(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유경 신도비는 지곡면 연화리에 있다. 무덤의 북쪽 길가에
신도비가 북서향으로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 화강석 기
단 위에 높이 195㎝, 너비 81㎝, 두께 40㎝의 비신을 세웠으며,
4면에 비문을 음서하였다. 비신위로 옥개석을 올렸는데, 처마가
비교적 세련되게 처리되었다. 외손자인 유척기(
基)가 짓고
전서를 썼으며, 윤급( 汲)이 글씨를 썼다. 1764년 아들인 김한
방이 건립하였다.
김유경(? 慶 1669~174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덕유(
), 호는 용주(
) 또는 용곡( 谷)이
다. 169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
제하였다. 이듬해 설서를 거쳐 1714년 함경북도암행어사를
시작으로 사간?교리?대사?대사간?동지경연?참판?도승
김유경 신도비
지?한성판윤?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5년 호조참
의가 되고, 도승지?대사헌을 거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
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730년 형조참판이 되고, 1736년 호조참판?부제학을 거쳐 판윤?평
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744년 대사헌이 되었고, 1746년 좌참찬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48년 숭록
대부에 특진되었으며, 1761년(영조 27)에 효정(
)이라는 시호 및 명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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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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