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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서산의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록하여 묘 입구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를 통해 죽은 사람의 뛰어난 업적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이 되기 위해서
이다. 신도비는 귀부, 비신, 옥개석의 세부분으로 나뉘며,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우리시 관내에 있는 신도비를 살펴보고, 신도비의 인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김홍욱 신도비는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에 있다. 신도비는 김홍욱 묘소의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오석의 신도비는 장방형의
학예연구사
화강석 대좌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 221㎝, 너비 88㎝, 두께 43㎝이며,
전면에 명문을 음각하고 있다. 신도비명은 송시열(
)이 짓고, 윤득화
)가 썼으며, 유척기(
基)가 새겼다.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1983년에 세웠다.
김홍욱(?
1602~16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이며, 자는 문숙(
), 호는 학주(
)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
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며, 청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고, 1646년 이조좌
랑이 되었으나, 권신 김자점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효종 즉위(1650
년) 이후 집의, 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
)가 되어 충청도
에서 대동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654년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
하였는데 이 해에 효종이 구언교(求 敎)를 내리자 8년 전 사사된
김홍욱 신도비
회빈 강씨(소현세자의 빈)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그가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에 의해 하옥되어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김홍욱의 관작 복구는 효종 10년(1659년)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주청으로
이루어졌으며, 1718년(숙종 44)에는 민진후의 주청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이듬해인 1719년에는
문정공이라는 시호까지 받게 되었다.
김홍익 신도비는 지곡면 도성리 선바위 포구 안쪽에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석 대좌 위에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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