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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전체를 돌아보았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서산지역에는 선앙골 23명, 황골(팔봉면 대황
리) 17명, 소길리(팔봉면 금학리) 32명, 가재(음암면 상홍리) 57명의 신자들이 거주하였다. 이 지역
신자들이 어떻게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어떻게 살았는지는 한 집안의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2)
가재를 거쳐 소길리에 정착하여 살게 된 조상환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때부터 대대로 신자인 그의 집안은 병인박해의 소식을 듣고 밤을 틈타 피난길에
나섰다. 우연히 한 신자를 만나 피난처를 물으니 음암 상홍리로 가라고 하였다. 그곳은 교우촌이고
피난하여 사정을 말하면 도와줄 거라는 거였다. 이들은 상홍리에 살다가 생계를 위해 다시 한 번
소길리로 이사하였다. 소길리는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신자여서 외부에서도 교우촌으로 알려진
동네였다.
위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상홍리, 소길리는 병인박해 이전부터 교우촌이었던 마을로 박해가
일어난 후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박해를 피해 외지에서 오는 신자들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서산지역의 교우촌들은 다음과 같다.
<표1> 서산지역의 교우촌(1883~1889).
출처 : 『천주교 대전교구 통계자료집』
황골(팔봉면 대황리), 원마루(운산면 수평리), 황소고개(고북면 용암리)
소길리
가재
선앙골
황골
대방리
원마루
황소고개
(금학리)
(상홍리)
(서낭골)
1883~1884
1884~1885
32명
81명
23명
17명
1885~1886
17명
102명
26명
25명
1886~1887
58명
52명
26명
46명
25명
1887~1888
50명
49명
26명
48명
14명
1888~1889
64명
54명
28명
33명
113명
표 1)에 보듯이 서산지역에서는 소길리, 상홍리 교우촌이 가장 오래되고 큰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교우촌을 포함하여 다른 지역 교우촌들은 1890년 합덕 본당이 설립되면서 공소로 전환되었고
새로운 공소들도 생겨났다.
서산 본당의 모체인 수곡(홍성군 결성면 공리) 본당이 생기전의 기록(1903~1904년 보고서)을
보면 너리실(성연면 명천리), 아나미(성연면 고남리), 미럭벌(운산면 용장리), 강당리(운산면 용현
리), 일락골(해미면 황락리), 한티(해미면 대곡리)에 새로운 공소들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길리는 위, 아래 공소로 나뉠 만큼 커졌고 한티 공소도 위, 아래로 나뉘었다.
2) 조상환,
『하산 조상환 회고록』
, 가톨릭출판사, 1999, 1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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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_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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