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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우촌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박해가 끝난 후 초창기에 공소가 된 교우촌들은 모두 서산 외곽에 형성되었다. 박해의 영향으로
서산 도심에 본당이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 기간 동안 서산지역 천주교
확산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은 오지에 위치한 공소들이었다. 그 공소들 중에서 몇몇 곳은 후일 서산
지역에 본당이 설립될 때에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서산 외곽의 공소들을 거쳐 서산 도심에 본당이 자리하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본당 이전이 있었다.
이 과정들은 서산지역 천주교 확산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먼저 그 확산의 방향을 살피고 그 안에
있었던 기억할 만한 사실들을 살피려한다. 이를 통해 서산지역 천주교의 특징이 무엇인지 드러나
기를 바란다.
이 글의 대상으로 삼는 지역은 2009년 현재의 서산시 지역이다. 지금은 당진군에 속한 정미
면과 대호지면은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서산에 속했었다. 그곳에 있던 산성, 도산,
마중, 봉성 4개 공소는 1957년 11월 이전에는 서산 본당 관할 공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상으로나 천주교 관할구역 상으로나 서산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이곳들은 제외하였다.
2. 서산지역의 공소들
병인박해(1866)는 천주교 신자들이 살던 교우촌의 분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박해기간
중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며 활동의 중심지였던 교우촌들은 초토화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대표
적인 경우가 내포지역의 중심 교우촌이라 할 수 있는 신리이다. 그곳은 병인박해 이전 온 마을이
다 신자일 정도였으나 박해가 끝난 후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를 배척하는 마을로
변해있었다.
1)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된 처절한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여
개인적으로 혹은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876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런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데 이들의 분포를 보면 박해 속에서 신자들이 어느 지역으로 피난을 하였
는지 알 수 있다.
병인박해 이후 서산지역을 처음 방문한 선교사는 두세(Doucet) 신부로 1884~1885년에 걸쳐
1) 뮈텔일기 1896년 10월 26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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