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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아산지역의 3·1운동은 서울의 3·1운동과 직접 연계되지 못했다. 다만 천도교 권병덕의 지시를 받
은 현창규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서울의 3·1운동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독립만세운동이 각
지방에서 전개되는 전국적인 현상에 영향을 받아 전개됐다. 이 지역의 3·1운동은 타 지역보다는 조
금 늦은 3월 11일에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4월 4일까지 전개됐다.
■ 온양의 3·1운동
서 가져 온 독립선언서를 시장 군중에게 배부하
고 공립 보통학생 100여명과 시장 군중들과 함
온양 3·1운동은 3월 11일부터 시작됐다. 온양
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5일에는
의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100여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4월
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
1일에는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다. 그러나 학교장이 만세를 부르는 학생들을 설
득하자 일단의 학생들은 자진 해산을 했다. 자진
■ 영인의 3·1운동
해산을 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영인 3·1운동은 3월 14일에 있었다. 아산의 구
한 것을 계기로 하여 온양 시장에 나아가 독립만
읍인 아산리 시장에서 약15명이 태극기를 들고
세를 부를 것을 결의했다. 이 정보는 일제에 의
독립만세를 부르자 이에 시장의 군중들이 합세
해 탐지됐다. 즉 온양 헌병대는 이튿날인 장날을
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있을 것을 탐지하고 학교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
부근에 임사로 파출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헌병
중들을 제지하여 잠시 진정됐다. 그러나 오후6
들의 판단으로 의심이 가는 학생들이 있으면 구
시경 다시 수백 명이 읍 밖에서 집합하여 읍내로
타를 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저지하려는
진입을 시도하면서 또한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시도를 했다.
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
일제의 폭력적 사전 저지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인면 수형자 명부를
인 3월 12일에 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은 동맹
보면 신운리 10명과 신화리 7명 총17인이 4월
휴교를 하고 온양 시장으로 나아가 학생 30여명
15일과 23일에 거쳐 온양 헌병분견소에서 태형
을 중심으로 시장 군중 200여명이 합세하여 독
60도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초기
립만세를 부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15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는 주도
3월 14일에 온양 장터에서 또한번의 독립만세
인사의 인원이 명시된 기록과 헌병이 출동하여
운동이 있었다.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진압하였다는 기록 및 후술할 4월 2~3일에는
천도교 권병덕의 지시를 받고 귀향한 현창규가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한 점을 고려하면 이 독립
서만수, 권태하, 김치삼등과 독립만세를 부를 것
만세운동은 정양호, 최점옥, 윤선권, 홍원유 등
을 결의했다. 이들은 온양 장터로 나아가 서울에
의 신화리 주민과 신운리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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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타이딩
A-san of Ti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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