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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옥 균
[ 1]
이조 말엽에 태어난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그는 폭풍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조국을 구하고자 개화 독립당을 위하여 민씨 정권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벌이다가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조국도 아닌 머나먼 상하이에서 자객
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는
일 철종임금
1851
2
23
2
그의 아버지는 김병태이며 어머니는 송씨였다
우리는 그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총명함이
널리 퍼져 그 당시 세도가였던 김병기의 양자가 되었다
김옥균에 대한 일화 하나를 들기로 하겠다
그는 밤에만 글을 읽고 낮에는 자연을 벗삼아 돌아다니면서 수양을 쌓는데 정력을 다 쏟
았다
그래서 강릉에 살고 있는 양반 자제들이 놀기만 하는 부사의 아들이다 라는 비웃음을 받
았다
그러던 중에 강릉에 있는 오죽헌에서 옥균과 다른 양반이 결과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되자 부사의 아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책을 많이 읽는 어른보다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탄복하며 옥균의 시와 서화는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는 칭찬이 관동일대
선비사이에 퍼졌다
김병기의 양자였던 그는 양부의 훌륭한 정치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깨우쳐 후에 가서
훌륭한 애국자가 됐다
이 세상에 뛰어난 천재로 태어나 가장 어려울 때를 만났는데 뛰어난 공적도 없이 슬픈
"
죽음만 남았으니 옥균이여
……
"
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둔덕에 시체는 갈기갈기 찢기워지고 머리카락만
1914
묻히던 날 그의 친구 박영호는 추도사를 읽다가 그만 목이 메어 울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라를 구해야 겠다고 개화를 부르짖던 옥균이
년 혁명에 실패하자 그의 아버지는
1884
천안 감옥에서 사약을 마셔야 했고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음독 자살을 하였으며 동생은 서
울 감옥에서 옥사하고 아내는 옥천의 관비로 하천되어 고생하다 죽어야 했다
세월이 바뀌어 새로운 문명이 조석으로 변할 때 우리 나라의 약함을 틈타 강한 나라들이
침략하려고 하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며 개혁의 횃
불을 들었던 김옥균과 그 동지들은 혁명에 실패하자 슬픈 종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는 혁명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었다
예의사상에 밝았던 우리 나라 선비들은 한번 약속을 하면 몸을 바쳐 그 약속을 지키는 것
이 사나이의 도리라고 생각했을 때로서 김옥균도 일본 사람들을 우리 나라의 선비처럼 믿었
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우리 나라보다 개화된 일본이라 믿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원래가 섬나라 사람들은 도량이 좁고 간사하다는 말도 있듯이 그들은 처음부터 한국을 침
략할 목적이었으므로 그까짓 정치가 한사람과의 약속같은 건 잠꼬대 같이 생각 했었다
약속만을 철석같이 믿었던 김옥균은 일본에 망명하고서도 그들의 힘을 빌어 우리 나라를
개화시키고 어느 나라도 침범하지 못하는 튼튼하고 건전한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고 호소도
해보고 분노도 해 봤지만 그들은 아랑곳없이 이나라를 하나씩 하나씩 침략의 손길로 삼켜버
리고 말았다
어리석은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그를 죽여 없애 버리려고 계속 자객을 보내고 그는 타국
에서 쫓기는 몸으로 방랑을 해야만 했다
일본에서도 여기 저기로 읍리 표박생활을 해야만 했고 끝내는 그들은 믿을 수 없이 중국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건너 갔다가 끝내 이 나라에서 보낸 자객의 흉탄에 쓰러진 김옥균
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속에 묻혀간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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