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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은 당시 온양 병원을 본거지로하여 맥을 유지하면서 암암리에 세 확장을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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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어수선한 상황 하에서 우익 진영에서는 당시의 충남도지사를 방문하여 경찰관을 아산군에
파견하여 주도록 요청한 바 당시 충남도지사가 이를 수락하여 아산의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관들을
온양에 보낸다 그러나 이 때를 같이하여 좌익 진영은 무장 인원을 동원하여 트럭을 타고 온양에 진
주하는 경찰관들에게 총격을 가해 경찰관들이 온양 진입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도록 하였다 이에
우익진영은 충남도지사를 재 방문하여 피해 보상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무장 경찰관을 온양에 진주
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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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 무렵 미군이 온양지방에 들어왔다가 좌익 진영의 난동으로 일시 물러갔으나 우익 진영
무장 경찰대의 온양 진주와 일대의 자치 능력이 자리를 잡게 되자 이에 맞추어 그들도 온양에 재진
주 하였다 온양 진주에 성공한 미군은 육군병원 자리에 주둔하고 향후 아산 일대의 여러 가지 문
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니 이로써 우리나라에 군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6.
한국전쟁과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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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아산과 공주 일대의 산촌
으로 피란을 해 왔다 이 것은 정감록 비결의 영향을 받은 현상이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군이 온양 지방에 진입한 것은 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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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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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를 앞세우고 온양으로 들어왔다 북한군 일부는 당시의 철도호텔에 주둔하였고 그들의
전차부대는 공주의 유구면을 바라고 송악면 쪽으로 남하했다 북한군이 온양에 진주하자 그동안 우익
진영으로부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던 좌익 진영은 인민위원회와 보안서 민청등의 조직을 만든 후 우
익 관련 인사들과 양민들을 대거 색출해 내어 대량 학살을 자행 하였다.
이 후 온양 경찰서 청사에는 온양보안서 라는 간판이 붙게 되면서 온양 일대는 완전한 북한군의 치
하에 처해지게 되었고 북한군은 지역내의 학교와 직장들을 통제하여 그들에게 협조하도록 강요하면서
많은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전쟁터로 송출했다
온양 양조장 자리에는 북한군 소속인 군사위원회가 조직되니 이들은 감자나 호박 등 곡식들을 현물
세라는 명목으로 강제 수탈을 자행 하였는데 부과 기준으로 참깨 알까지 헤아려대는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한편 각 부락 마다 청소년들로 구성된 보안대를 만들어 동네 경비를 맡게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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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전 군내 일제히 인민재판을 열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일도 있었다.
이 무렵 당시 온양중학교 교사와 남녀학생들로 구성된 지하조직 반공단체인 태극동맹 회원들의 항거
를 비롯하여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아산군내 곳곳에서는 각종형태의 지하조직체인 반공구국단체의 활동
이 활발하였다 이들은 주로 북한군과 인민위원회 등에 붙잡힌 인사들의 구출 작업 적의 무기고 습격
북한군의 군사작전 방해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와중에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아깝게 목숨을 잃어야 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온양읍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시가지의 피해는 충남도내 중소도시 가운데에서 가장 심한 정도였는 바 이는 북한군이 온양으로 진
주한 직후
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하고자 몇 대의 야전탱크를 지금의 용화리 소재 과수원에다 은신을
시켰는데 한 번은
군의
폭격기가 북쪽을 향해 온양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은신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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