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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리고
1937
년에 이정진을 중심으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끼리 승마구락부를 창설하여 승
마를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승마에 필요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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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당시의 일본군 조선군이라 칭했음 사령부
에 임시대여 신청을 하여 일본군 참모총장 이하 으로부터 말을 대여 받았다 당시 일본군으로
부터 말을 대여받는데 있어서 두가지 조건부로 대여케 되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첫째 승
마구락부라는 명칭을 아산기도회로 바꾸어 쓸 것 둘째로 말을 대여하되 그 말의 건전하고 철
저한 사육관리를 책임질 수 있는데 대한 서약서를 쓰던지 대여기간동안 일본인 우선 승마를
이행한다는 너무도 차별적이고 까다로운 대여 조건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승마의 기술을 열심히 닦고 노력한 보람으로
1941
년 온양 공설운동장에서 개
최한 고등마술대회에서는 이 대회에 출전한 일본군 이하라 참모총장과 사사끼라는 일본군 대
좌 등을 당당히 물리치고 대 장애물 경기에서 한국인 성기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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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2
그리고 온양과 아산지방의 체육활동으로써 빼놓을 수 없는 특기사항이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닌 궁도라고 할 수 있겠다.
온양 남산공원 중턱에 자리잡은 활터가 있었는데 정희복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활을 쏘
며 체력을 연마 각종 궁도대회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온양과 아산 궁도의 실력
을 크게 과시한 바 있었다 이곳 남산공원 활터는
1964
년경에 아깝게도 없어졌다
? 1946
년 이정진을 중심으로 이택상 이주진 유석환 남궁현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온양
체육대회에서 축구 배구 농구 야구 정구 탁구 육상 등 많은 체육활동을 벌여옴으로써 주민
체위 향상에 기여한 바 있었다.
당시의 온양 체육회장은 명예직으로서 지역사회 문제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 왔으며 반면에 체육회장은 많은 재정적 지원을 감당해야되는 고충도 없지 아니하
였다 이런 중에서도 특히 축구와 정구 등 여러종목에 걸친 전국대회를 온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최한 바 있다 그후 우리 고장의 체육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온양 체육회가 아
산지방의 체육활동을 주도해 오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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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1968
5
목적으로 제정 공포된 체육진흥법에 따라 아산군 체육회의 조직이 관주도형의 조직으로 바뀌
면서 회장에는 아산군수가 부회장에는 경찰서장 교육장이 각각 자동적으로 맡게 되면서부터
모든 체육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매년 대전에서 개최되는 도민체육대회 출전과 소
년체전 등의 체육대회에 아산 체육회로 출전하게 돼 온양 체육회의 특색은 사라지고 아산 체
육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봉사단체 사회단체 또는 친목단체들이 주최하는 직장대항 또는 읍면대항 배구 축구
등 체육대회가 빈번하게 개최되기도 했다.
그외 정구 축구 등 각종 조기 체육팀들이 늘어나게 되고 국가 도대표급 각종 선수들이 배
출되었으며 체육시설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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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이 고장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일반 체육행사로는 당시 대검찰청 수사국장으로
있던 김세배가 마련한 프로레스링 대회를 온양고등학교 운동장 특설링에서 베풀어진 것으로서
이 대회때는 인근의 천안 서산 등
7, 8
개 시군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자동차를 대절 온양에
와서 이 대회를 참관한 바 있다.
다음으로
1962
년 온양문화원이 주최한 공보부장관 우승기쟁탈 군내읍면대항 축구대회와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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