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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아산군 일동면의 지역으로서 처음에는 워라미 월랑 월라미라 하던 것이 변하여 워랑
이 도는 월랑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수리 용평리 신성리를 병합하여
월랑리라 하여 음봉면에 편입됨 이곳에 운중반월형의 명당이 있다함.
5)
입향
월랑1리는 처음 터를 잡고 산 성씨는 임씨이고 마을 인구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로 현재가
가장 많으며 지금118가구가 살고 있다.
월랑2리 장수마을은 9대째 진도 김씨가 살고 있으며 마을의 생성년대는 약270년 정도로 추
정되며 마을이 제일 번성한 시기는 20년전으로 현재는 64가구만이 살고 있다.
6)
지명
월랑이 : 월랑리에서 으뜸가는 마을. 성황당이 있었음.
당모루 : 신성옆에 있는 마을 성황당이 있었음.
신 성 : 월랑이 북동족에 새로 된 마을
용 뜰 : 용뜰에 있는 마을
장 수 : 용뜰 남쪽에 있는 마을 .
용 뜰 : 워랑이 앞에 있는 들 .용화산 동남쪽이 됨.
월랑천 : 월랑리에서 덕지리를 거쳐 대동내와 을지내가 합하여 매곡천으로 들어감.
월랑저수지 : 월랑리에 있는 만수량 555천톤인 저수지.
고인돌 : 고인돌이 두 개가 있으나 하나는 거의 파손되고 하나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
아있다.
월랑리 절터 : 당모루 마을 뒷산에 절터가 있음.
7)
전설
목베기
고개
음봉면 월랑리에 장수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일제시대 일본사람이 산혈을 보니까 장
수가 나올 마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서 장수가 나오면 일본에 영향을
크게 미칠까봐 마을 뒷산에 그리 높지 않은 산의 목을 잘랐다. 그래서 이 마을은 장수가 나
오지 않았다. 지금도 산목을 자른 곳이 남아 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마을 이름을 장수라
불렀다.
산의 목을 자른 고개이므로 목베기 고개라 한다. 일제시대의 압박으로 수많은 인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지만 그 과거를 거울삼아 보다 발전된 한국 세계
선진대열에 당당히 1위로 설 수 있는 빛나는 한국을 만들도록 각자 본분을 지켜 이러한 서
글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본다.
이무기
음봉면 용화산에 있는 크고 긴 굴로 이무기굴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오랜 가뭄끝에 단비를 맞이한 음봉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삽을 들고 가던 중 주위에서 들
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소리를 찾아 나서니 큰 연못에서 청색이무기와 황색 이무기가 서로
엉키어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놀란 음봉은 호기심에 못이겨 그 싸움을 지켜보았다.
황색의 이무기는 피를 많이 흘리며 고통의 신음소리와 함께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음봉이는 황색의 이무기를 돕고 싶은 갑작스런 마음에서 청색 이무기를 향해 들고 있던 삽
을 힘껏 던졌다. 금속성 소리를 울리며 뛰쳐나간 삽은 청색 이무기의 몸에 깊숙히 박혔다.
청색이무기는 음봉을 향해 저주와 원망의 눈초리를 보낸 후 자위를 감추었다.
잠시후 황색 이무기는 하얀 수염의 노인으로 변해 멍청히 서 있는 음봉에게 다가왔다.
"당신의 덕분으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
음봉은 갑작스런 변화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저는 본디 하늘의 문지기였답니다. 하루는 낮잠을 자던 중 하늘의 급한 용무로 온 사자를
문을 열어주지 않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전 옥황상제님의 벌로 천 년을 이무기로써 지내며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착한 일, 천가지를 해야만이 죄를 면할 수 있겠지요, 오늘이 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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