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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웬 놈이냐?
수비대의 물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대한민국 청년이다
이 대답에 수비대들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총 개머리로 난타하였다.
오늘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나는 우리 나라를 찾기 위하여 독립만세를 불렀을 따름이다
주재소를 부수었는지?
먼저 총질을 하기에 주재소를 부수었다
대략 이상과 같은 문답이 오고 갔다 수비대들은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악형을 가하며 주모자를 색출
하려 했으나 청년 송봉운은 외면하였다 그는 몸을 운신조차 할 수 없으리 만치 모진 매를 맞았다 그러
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놈들은 송봉운을 서산으로 연행한다 하며 앞세워 걸어갔다 그는 잘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일으켜 간신히 걸었다 그러나 청년투사 송봉운은 태연히 걸었다 면사무소 앞을 떠나 약
200
미터 지점 논두렁을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따라오던 수비대 놈들의 총구에서는 무자비하게도 아무 반항
도 없는 이 청년지사를 향하여 불을 뿜었다 야반에 울린 반의 총성에 우리의 청년지사 송봉운은 천추
3
에 한을 품고 호국
護國
의 영령
英靈
으로 가시고 말았다 실로 천인공로
天人共怒
할 만행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의 시체는 격분과 원한에 찬 그리고 겁에 질린 수명의 친구들의 손에 의해서 남몰래 근처
산에 파묻히었다.
당시
(1919.4.6
보고 일본보고문서 조선헌병사령관 일본육군대신께 에는 충남 천의 주재소에
800
명의 폭
도가 내습하여 순사 명 순사보 명중 명 중상을 입고 일인 명 경상을 입었으며 서산서
1 ,
2
1
1
瑞山署
진서
唐津署
에서 경관 명 홍성수비대
8 ,
洪城 守備隊
로부터 군인 명 부원
5
赴援
하여
21
명을 체포 해산
시키고 아직도 불온의 징조가 보여 재유내지인 일본인
) 14
명을 서산에 끌어올리고 동주재소는 인원 보
충이 안되어 일시 폐쇄하였다고 공문서에 기록보고 하였다.
5.
거사후의 여파
餘波
헌병대와 고등경찰의 만행
수비대들은 닥치는 대로 면내 청장년을 구속 난타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여 주모자 주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홍성 수비대는 당일 애국지사
21
명을 체포하고 천의에 있는 일본인
14
명은 전원 서산으로 철수하고 주
재소는 한동안 폐쇄하였다 이에 횡액
橫厄
을 두려워한 면민들은 대부분이 산골로 피하였다 그리고 바
다를 건너 인천 서해도서 서해안 그리고 당진 고대로 피난하여 개명
改名
도 하고 머슴을 살기도 하며
변신하여 숨어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즈음 때아닌 광목장사들이 각 가정을 찾아 포목을 팔고 다니었다 이가 곧 악명높은 사복 헌병이었
다 이들은 각 가정을 무단히 들어 다니며 부녀자들을 구타하고 주인의 행방을 탐색하였다 그리고 부락
이장을 위협하여 도로 공사에 출역하였던 출역자 명단을 제출토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헌병 수비대
경찰 염탐꾼이 상호 기맥을 통하여 야경
夜警
변장 등으로 밀정
密偵
을 들여 온갖 수단방법을 다하여
수색검거에 노력하고 면내 민적
民籍
조사를 이용하여 출입 및 거동을 사찰하여 독립운동의 여지를 없
게 함 은 물론 주민을 괴롭혔다.
그러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앞장서서 했었어도 전세환
全世煥
은 처조카가 천의주재소 순사보
巡査補
로 있었기에 아우인 전필환과 함께 형을 면하는 행운을 얻기도 하는가 하면 민재봉
閔載鳳
은 당질인
민개현 당시 서산경찰서 순사보 에게 체포되어 가면서 웃지 못할 일화를 남겼다 이놈아 하필이면 네놈
이 이 당숙을 잡아 갈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당숙보고 독립운동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송전에서
서산까지 가면서 나눈 이야기는 당시 한국의 비극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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