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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불쾌한 일이라.” 하고, “유생이 대궐에 들어와 통곡을 하는 것은 천고에 없는 일이라.”고
충절이 세상에 본보기가 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自菴集)』이 있고, 묘소는 예산군 신암면
하여, 김수성, 박세호, 윤언직, 홍순복 등과 함께 투옥하였다. 1521년(중종 16) 평해로 유배
종경리에 있다. 묘비는 1640년(인조 18)에 건립되었고, 유허비는 1934년 건립되었는데, 이
되었다가 1531년(중종 26) 예산 대흥현으로 옮겼으나 그해 8월 그곳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때 신도비도 함께 세워졌다. 또한 그가 죽은 후 예산 향천리의 덕잠서원, 임피의 봉암서원,
46세였다. 묘소는 예산 대흥면 교촌리에 있는데, 1605년(선조 33) 신원이 회복되었고, 우천
장단의 임강서원, 남해의 죽림서원에 영정이 봉안되어 향사되었다. 또한 1746년(영조 22)
사(牛泉祠)를 세워 봉향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牛泉遺稿)』가 있으며 현재의 우천사는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고, 1747년(영조 23)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이담(李湛: 1510~1575)은 을사사화 때 의리를 지키다 피해를 입은 유학자이다. 그의 자
김구(金絿: 1488~1534) 또한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더불어 개혁 정치를 추구하다 희생
는 중구(中久), 호는 정존재(靜存齋), 본관은 용인인데 종유의 아들이다. 예산군 덕산 고산
된 기묘명현의 한 분이다. 그의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삼일재(三日齋)인데, 대
에서 거주하였으며, 김굉필의 문인이다. 1533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
흥현감 김계문의 아들로 서울 연희방(현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하였다. 김구가 예산과 인
언, 수찬, 지평을 거쳐 1544년(중종 39)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받았다. 1545년(인
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 김계문이 대흥현감을 역임하면서 예산현 입암면(신암)에 입향하
종 1) 공조정랑이 되었는데, 을사사화로 많은 사림이 희생되고 윤원형 등이 정권을 잡게 되
게 된 것인데, 처가인 전의이씨가 이곳에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자 김굉필의 문인이라 하여 관직을 삭탈 당하고 심사에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에 열중하여 1503년(연산군 9) 한성시에 1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 2) 생원, 진사시에
벽서 사건에 또 연루되어 중도부처 되었다가 1551년 풀려나와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모두 장원을 하여 시관을 놀라게 했다.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을과로 합격한 뒤 1515
1565년(명종 20) 영의정 이기가 갑자기 죽자 그 세력들이 축출되면서 다시 관직이 회복되
년(중종 10) 기준(奇遵)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이어 홍문관수찬, 부교리
었다. 1567년(명종 22) 전한으로 등용되어 응교를 지내고, 명종이 죽자 춘추관 편수관으로
를 거쳐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몸이 아파 잠시 사직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이조좌랑,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어 사간, 승지를 거쳐 1574년(선조 7) 병조참의에 올
정랑, 사간, 홍문관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5월 김식이 성균
랐다. 그는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의약, 천문, 산수, 궁술에도 능했으며, 문장과 서화에
관대사성이 되자, 그의 후임으로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남곤, 심정, 홍
도 일가를 이루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특히 퇴계 이황을 사숙했다. 저서로는 『정존재집(靜
存齋集)』이 전하고, 덕산의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경주 등 훈구 세력들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화를 입었으나 정광필, 안당에 의해 구조되어 개
령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옮겨졌다. 남해에 유배된 지 13년 만
그 밖에 한말 민족적 위기에서 다시 예산 지역 유학자들의 의리가 발휘되었다. 서구 열강
에 전라도 임피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후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의 침탈과 일제의 침략 앞에서 예산 지역의 유학자들도 궐기했으니 최익현, 이남규 등이 대
러나 유배 중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어 처음 참배할 때 산소 앞 토교(土橋)에서 산소를 바라
표적 인물이다.
보다 기절해서 말에서 떨어졌다 한다. 그는 이때 다친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47세에 세상을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인데 경기 포천 출신이
떴는데, 그 후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다. 9살 때 김기현의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14살 때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그는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와 더불어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
의 문하에서 배웠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벼슬에 나아간 이
로 꼽힌다. 인수체를 창안한 인물이 바로 자암 김구이다. 그는 중종으로 하여금 사림파의 개
후 사헌부지평, 사강원정언, 신창현감, 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수봉관,
혁 정치에 적극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일에 임해서는 매우 강직하였다. 또 조광조와
지방관,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불의와 부정의 척결에 앞장서서 강직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함께 소격서의 혁파에 앞장서고 대간의 현실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당시 정
1868년(고종 5)에 올린 상소에서는 경복궁의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이의
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충암 김정(?庵 金淨)과 함께 ‘삼암(三庵)’으로 불려 이들 3현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의 정신이 잘 발휘된 것으로 막혔던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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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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