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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안일관
安日觀
<1669(현종 10년) ~ 1730(영조 6년) >
조선 후기의 효자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순흥
안씨 신창 입향조 수인(守仁)의 현손이며 예종(禮宗)
의 손자이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온량(溫良)하고 마
음이 곧고 부모에 대한 예의범절이 남달리 뛰어나 종
가의 귀감이 되어 오던 차에 아버지께서 병환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노구의 몸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
여 부모를 섬기는데 많은 의원들을 데려와서 치료를
지극히 하여 드렸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 날 한
의원은 걱정을 태산같이 하며 청아(菁芽-무순)를 다
려드리면 병환이 낫는다고 하였다. 때가 엄동설한임
<안일관 효자 정려>
에도 불구하고 겨울 밤에 일관은 청아를 구하기 위하
여 온갖 산천을 돌아다니었으나 허사였다. 그가 기진맥진한 끝에 앞마당에 제단을 차려 놓고 하늘을 우러
러 보며 청아를 기원하니 뜰 안에 청아가 삽시간에 바람에 날려 들어왔다. 정성을 모아 다려 시약(施藥)하
니 아버지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아 오래 사시게 되었다. 그 후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한 베개를
베고 잠자리를 같이하며 자기의 체온으로 늙으신 아버지의 체온을 따뜻하게 해 드렸다고 한다. 그의 효성
이 구전되던 때에 충청도 관찰사 심선지가 신창현에 들렀다가 신창면 궁화1리에 효자문(정려)을 세우게
하였고 1891년(고종 28)에 세워져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40] 오명걸
吳命傑
< ? ~ ? >
조선 후기의 효자이며 신창현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된 비
연(斐然) 희문(希文, 1539~1613)의 후손이며 선전관 도빈(道彬)과 효부 정(鄭-동래)씨의 손자이고 수경
(遂慶)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베어서 구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3세의 지극
한 효행이 한 집안에 빛났다고 칭송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신창 신달리에 정려가 세워졌다. 지금
은 없어졌지만 신달리 구억말 앞은 그의 정려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정문터라고 부른다.
[41] 윤대형
尹大亨
< ? ~ ? >
조선 중기의 효자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중종의 2계비(繼妃)인 문정왕후의 아버지 파산부원군(坡山
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5세손이다. 1665년(현종 6)에 왕이 온양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이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독행순효(篤行純孝-독실한 언행과 지극한 효성)로 천거하고 방백(方伯-관찰사)이 조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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