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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통정대부홍문관부제학지제교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행봉정대부이조정랑겸경연시강관
춘추관수찬관창원유공휘형추모비
조선국조 정능(靖陵)지세에 군현 휘정(彙征) 대유(大猷)시에 간흉을 멸하고 잔당을 소탕하여
베니 세도(世道)가 교체되어 이것이 이른 바 기묘사화(1519년) 도원(桃園) 유공형이 이때에 정언
(正言)으로 지평 윤개(尹漑)와 더불어 정암 조문정공을 구명하기 위하여 항장(구금을 반대하는 글)
을 하니 드디어 공이 문망(文網)에 걸려 내치고 수년동안 가평에 은둔하니 조정에 서종당엔
당금(當禁)이 조금 풀려 공을 전랑(銓郞) 제수하니 그 때의 일이 위태하고 조정이 불안함을 의
심하고 모친을 봉양한다고 하여 청풍골 원임으로 가기를 아뢰고 벼슬을 얻어 을유년 유월
삼일 관아로 가다가 관아 거리에서 죽었다. 성종 임인년 사십사세이며 파주 파평면 신곡리
선영 갑좌(甲坐) 유명유언으로 장사지내다 선조무진(宣祖戊辰 1568년)에 증 공 홍문관 전한으로
추증하고 영조병인(英祖丙寅 1746년)에 추증하고 기묘년 명신인 상신(相臣) 송인명(宋寅明)이 아뢰
기를 고 정랑(正 ) 유형(兪炯)은 중종조의 명신 조광조 박상 김정 김식 윤개의 무리등은 임금
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미 동사(東史)에 나타났으니 그를 숭앙하고 포상선
양하는 것이 실로 성세(聖世)에 펴는 법입니다 하여 증명하여 증부제학 겸 관직을 추증함을
이같은예로하였다.
공의 시종이 대략이라 공의 자는 명중(明中)이요 도원(桃園)의 그 호이다. 창원씨는 고려 보
문각 직제학 휘(諱) 섭(涉)이 먼 조상이고 휘 경( )이 정당문학 첨서 밀직사사를 지내고 두 번
전하여 휘 홍(弘)에 이르러 사재(司宰)로 영치 왕시에서 벼슬하고 옥사(屋社)와 관을 버리고 인
제 월락산 속으로 들어가 죽을 때 까지 은거하였다. 아들 휘 귀생(貴生)은 본조에 벼슬하여
공조전서가 되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 휘 상지(尙智)는 한림 집현전 직제학 승정
원 좌부대언을 역임하고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어변갑동(魚變甲同 : 승진하여 높은 직에 났다는 말)
으로 추은(推恩)하였다. 모친은 순천김씨 사예(司藝) 둘째손녀이다. 공의 부인은 홍주이씨 사
간(司諫) 경종(慶從) 이부친이라. 공의 묘소에 합장하다 공은 정묘년에 진사하고 갑술년에 박
공 세희(世熹)와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삼사 이조정랑 충청도사 회양부사 양주목사 청
풍군수 곧 내직외직을 역임하다 정암(靜庵) 제 현인(賢人)들과 같이 물러가 그 덕의 풍절을 지
홍성의금석문_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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