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9페이지

97페이지 본문시작

예산의유교적학맥과학풍
거할 때 풀집을 짓고 외를 심고 대나무를 가꾸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친우였던 이성계가
1.예산의유교학맥
병조판서로 세 번이나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이조의 직함을 쓰지
1)도학파(의리학파)
말 것이며, 과거도 보지 말라.”고 훈계하고, 평소 북쪽을 향해 앉지 않고 마침내 절개를 굽히
2)한산이씨출신유학자들
지 않았다. 1986년 후손들이 예산읍 간양리에 창절사(彰節祠)를 세우고 그의 절의를 기리
황의동(충남대)
3)율곡학파
고 있으며, 묘소는 초막골(현 신예원 2리) 언덕에 있다.
4)우계학파
신숙서(申叔胥: 1435~1496)의 자는 상지(相之), 호는 죽당(竹堂), 본관은 평산인데, 예
5)실학파
산군 봉산면 일대에 세거해 온 평산신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그는 1451년(문종 원년)
2.예산의유교학풍
17살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대과에 합격하여 성균관학에 선발되고 이어 박사가
되었으며, 1454년(단종 2) 승문원교리로 승진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癸酉靖
1.예산의유교학맥
難)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이 죽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에 1456년(세조 2) 성
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비참하게 죽게 되자, 신
1)도학파(의리학파)
숙서도 홍주목 면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수차례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
유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덕풍현 고현내면 대지동으로 이사해 살게 되었으니
철학이나 사상은 역사적 산물이다. 시대적 배경에서 철학적 사고와 색채가 형성된다. 조
이것이 평산신씨의 예산 입향의 시작이다. 이후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강을 건너지 않기
선조에 있어 도학파란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의리적 가치를 선양하고, 몸소 정의의 실천
로 굳게 맹세하고,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고 자신의 호를 ‘죽당(竹堂)’이라 하고 교육에 전념
에 앞장섰던 학풍을 말한다.
하였다. 자손들에게는 “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두문불출하지만, 너희들은 학문을 게
박인우(朴麟祐: 1333~1410)는 고려 말 이성계의 혁명을 맞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을리 하지 말고 굳은 신념으로 세상에 나아가 그 이름을 떨치라.”는 교훈을 남기고 62세로
충절의 의리를 지켰다. 그의 호는 초암(草菴)인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강직하였다.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대지동 사곡(절골)에 안장하고 신도비를 세웠으며, 동학사 숙모
일찍이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배우고 정몽주, 길재를 존경하여 좇았다. 그는 1376년(고려
전(肅慕殿)에도 배향되었다.
우왕 2) 최영 장군의 휘하 장수로 홍산 전투에 참여하여 왜구를 크게 물리쳤고, 예산군 덕산,
또한 16세기 사화시대에 불의에 맞서 의리를 지킨 예산의 유학자로서는 이약수, 김구, 이
면천 일대의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최영을 죽이고 나
담이 있다.
라가 날로 혼란해져 이를 간해도 듣지 않자 물러나 은거하였다. 왜구가 전국 각지에서 노략
이약수(李若水: 1486~1531)는 15세기 초 기묘사화 때 의리를 실천하였다. 그의 자는 지
질을 일삼자 조정에서는 다시 그를 불러 1389년(공양왕 1) 10월 양광좌우도 수군 도만호가
원(止源), 호는 우천(牛泉), 본관은 광주(廣州)로 충주에서 출생했는데 김굉필의 문인이다.
되어 왜적을 모두 토벌하였다. 또한 침탈 지역 양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이들이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고, 1513년(중종 8) 성수침, 서경덕과 함께 특별히 추천되었으나
부담해야 할 토지 조세를 받지 않고 수군의 처자를 양육하는 위민 정책을 실현하기도 했다.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조광조 등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끝나고 기묘
마침내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해 왕이 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예산
사화로 수많은 사림이 죽고 귀양을 가게 되자, 성균관 유생 150여 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덕방산 자락 초막골에 은거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를 지켰다. 처음 은거했
대궐문을 제치고 편전문 밖까지 이르러 통곡을 하니, 중종이 몹시 노하여 “상소하면 되었지
던 초막골은 현재까지 지명으로 불리고 있는데, ‘초막골’이라 부른 까닭은 박인우가 처음 은
감히 대궐 뜰까지 들어와 통곡을 하는가. 유생의 체모가 이와 같으니 지금 곡성을 들으니 몹
3.선비의고장,예산
97
96
내포의뿌리예산학

9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