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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순양
順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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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열녀로 신창현에 살던 사비(私婢-사노비) 신분이었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섬겼으며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그 뒤를 따라 죽었다. 열녀 정문이 신창현 대동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가 없다.
[34] 신사찬
申思贊
< 1738년(영조 14년) ~ ?>
조선 후기의 효자다. 아산현에 살았으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대사성을 지낸 화당(化堂) 민일(敏一,
1576~1650)의 현손(玄孫)이고 아버지는 박( )이다. 31세 때인 1768년(영조 44)에 정시(庭試) 문과에 장
원급제하였고 전적(典籍)과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등을 역임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정성
을 다하여 부모를 위해 오계(烏鷄-오골계)를 구하고 있는데 오계가 스스로 들어왔다. 또 부모의 산소에
불이 나자 울면서 불을 끄고 있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기이하게 여기며 효
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생각하여 연명으로 청원서를 올려 포상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35] 신씨
申氏
< ? ~ ? > - 고세진의 처
조선 후기의 열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관리로 있던 고세진의 처다. 어릴 때부터 유순하고 영특했
으며 부모님께 순종하여 착한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출가 후에도 단정하고 부지런했으며 시부모를 효도
로 섬기고 집안의 화목에 정성을 다했다. 하인들도 사랑으로 대하니 하인들과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
다. 그러나 남편이 얼마 가지 않아서 병이 들어서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신씨는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천
지신명이시여, 남편 대신 저 아픔을 제게 주옵소서.’
라고 끝없이 기도했으나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떴다. 남
편의 시신을 염한 뒤에 슬픔을 누르지 못하고 끝내는 사람들이 잠든 틈에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
살하니 신씨의 나이 28세이었다.
그 후 암행어사가 아산 지방을 순회할 때 고을의 선비들이 이런 사실을 보고하니 어사가 임금께 아뢰어
1848년(헌종 14)에 정려가 내려졌다. 1861년(철종 12) 정려각을 세웠으며 열녀비와 함께 아산시 영인면
아산2리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명정 현판에는 당저, 즉 철종 신해년(1851)에 정려를 내렸다고 씌어 있
고 비에는 무신년(1848)에 정려가 내려지고 신유년(1861)에 세웠다(建)고 새겨져 있다.
<열녀 평산 신씨 정려각>
<열녀 평산 신씨 정려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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