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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런 조치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 후 7년이 지난 경인년(고종 27년, 1890)에 아산현 유생들은 마지막 비상수단으로 하충수의 사노 복
득(福得)에게 원정문(原情文-호소문)을 써서 주고 꽹과리를 가지고 상경해서 임금님께 직접 호소하도록
했다. 그 해 음력 3월 10일에 고종의 어가행렬이 지나가자 복득은 꽹과리를 두드리며 달려 나가 연유를
묻는 임금에게 원정문을 바쳤다. 그로 인해 그해(1890) 5월 26일에 정려를 명하고 필요한 재목과 목수 등
을 관가에서 제공하는 한편, 자손들의 연호부역(煙戶賦役)·환자환상(換子還上)과 모든 잡역을 모두 면제
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이듬해인 신묘년(1891) 3월 21일에, 그가 죽은 지 17년 만에 운정리(현재의 신운
리)에 열녀 정문이 세워져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30] 변희일
邊希一
< ? ~ ? >
조선 후기의 무신·충신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임진왜란 때 공을 많이 세운 무장 원성부원군(原城
府院君) 양걸(良傑)의 손자다. 관직은 오위도총부 도사(都事)와 파총(把摠-종4품)을 지냈으며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적군에게 길이 막혀 부
득이 충청도 진중으로 들어가 남한산성으로 전진하다가 금천(衿川-현재의 경기도 시흥 일대)에서 적군을
만났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서 종에게 가지고 가도록 한 뒤 힘써 싸우다 죽
음을 맞이했다. 뒤에 이 사실을 들은 효종이 그를 포상하고 병조참판을 추증했다. 이어 숙종 때에 신창현
대서면 신라리(大西面 新羅里-현재의 선장면 신성리)에 특별히 충신정려를 세우도록 했다. 그 정문이
1920년대까지는 보존되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31] 봉춘
奉春
< ? ~ ? >
조선 후기의 열녀다. 양가(良家) 출신으로 신창현 점인(店人-점원)의 처였다. 병자호란 때에 남편은 적
군에게 사로잡히고 적군이 그녀를 겁탈하려 하므로 죽기로서 저항하다가 피살되었다. 인조 조(朝)에 신창
현 대동면 잉동리(芿洞里- 뒤에 득산리)에 정려를 세웠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32] 불관
佛寬
< ? ~ ? > - 이진서의 처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열녀로 아산현에 살았던 관비(官婢)였다. 나이 열 여섯 살에 서울 사람 이진
서(李桭緖)의 처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수년 만에 남편이 병이 들었다. 불관은 대변을 맛보며 울
부짖었으나 마침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눈비를 가리지 않고 항상 묘소 옆을 지키며 삼년을 수묘(守墓)
했다. 한편 시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시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으면서 수절하
며 변함이 없으니 남들이 감히 난잡한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숙종 때(1705년 추정)에 정려를 세웠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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