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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관련 / 논문
보령문화원
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주는 일
게 하여 백성들이 그를 유임시켜 주기를 간절히
이었다.
바라고 있다는 조정의 의견으로 특별히 1년을
도로변에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몰
유임하게 되었다. 공주 공산성 아래에도 송덕비
래위치변경을시킬수있는것이다.언제어디
가있다.
로갔는지알수없는상황이다.아마도2010년
없어진 신억 영세불망비는 1867년 9월에 세
이후에누군가가연마하여비석돌로재사용하기
워졌는데, 관찰사 임기가 끝난 후 주민들에 의
위해 가져갔는지, 아니면 후손이 기념 보존하기
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석질은 남포오석이
위해 가져갔는지, 아니면 이해관계에 있는 후손
며, 크기는 48㎝×135㎝×21㎝이며, 자경은 대
이나 다른 사람들이 없애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자는 9㎝×9㎝, 작은 글씨는 4㎝ ×4㎝이며, 방
상황이다.
형의 비신에 갓석은 없는 상태였다. 전면에 대
현재두룡리비석군에는21기의비석이있는
자로 觀察使申公檍永世不忘碑, 전면우측 하단
데, 이 중에서 관찰사 박제순 비, 김제동 비, 현
에 작은 글씨로 同治六年丁卯九月 日 竪이라 새
감 이경간 비 그리고 남포오석의 개발 시기를
겨져 있어 1867년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추정해볼수있는현감정상박비등은보령향
후면에공적을새긴음기는없다.
토사 이해를 위해 우리가 한 번 정도는 주목 해
볼 수 있는 비석들이다. 어찌되었건 여기 있는
21기의 비석들은 보령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인
것이다. 무관심 속에 더 이상 분실되는 일이 없
기를바랄뿐이다.
신억(申檍, 1805~1874)은 본관이 평산으로,
조선후기 공충도 관찰사 공조판서를 역임한 문
신이다. 1864년부터 1867년까지 3년간 충청관
찰사를 역임하였다. 1864년 신억은 조정에 장
계를 올려 남포현감 유방주(兪邦柱)가 청렴하고
명철하게 정사를 잘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가 떠나는 것을 애석해 하니, 특별히 유임시켜
달라고 하여 그를 특별히 유임시키고, 표장받도
록 하였다. 1866년 관찰사 임기 만료가 되었으
나 정성을 다하여 궁벽한 곳의 백성들을 살아나
92 ChungnamCulturalMagazine!2023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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