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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김흥경(金興慶)(1677~1750)
김흥경의 묘 (신암면 용궁리)
백송
신도비
조선후기의문신으로자는자유(子有),숙기(叔起),호는급류정(急流亭)이며본관은경주이다.
두성의아들이며서산에서태어났다.김정희(金正喜)의고조다.1699년(순종25년)정시문과에
병과로급제하여검열,주서,정언,부교리,집의승지,대사간등을역임하였다.
경종때에는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있었는데그때경종은우유부단하고병이잦아국정
수행업무에과단성이없었다.병약하고후손이없는경종의급서를염려한대신들은하루속히왕
세자를책봉할것을주상께건의하여윤허를받고자하였다.그주축은노론4대신들로영의정김
창집,좌의정이건명,영중추부사이이명,판중추부사조태채등이었는데이주장이관철되어왕
제연잉군(후일영조)을세자로책봉하였다.그후김창집등의건의에따라업무를맡겨정무수
행을대리하게되었다.이에소론은승지김일경으로하여금노론을공격하게하는한편목호룡
으로하여금노론4대신을역모로무고하여4대신이하노론일파는극형을당하였다.이화옥으로
소론이집권하게되자목오룡은동성군(東城君)의작위까지받았다.이때김흥경도노론에연루
되어파직되었다.
1724년경종이죽자영조가즉위하게되면서소론일파가제거되면서도승지가되었고이듬해우
참찬으로동지사(동지전후중국에가는사절)로청국에다녀왔다.
1727년(영조3년)영조는신임사화를일으킨김일경,목호룡을처단하고노론과소론을모두등
용하는탕평책을시도하기위하여노론세력의일부도제거하였다.이에김흥경도쫓겨났다.이사
건을정미환국이라한다.이듬해다시우참찬으로복직되었으나,영조의탕평책에반대하다다시
쫓겨났다.소론일파의피비린내나는신임사화를겪었던앙금이남아있었기때문일것이다.
1730년좌참찬에복직되고이조판서를거쳐다시영전하여1732년(영조8년)에우의정에오르
고1735년(영조11년)에는영의정에올랐다.70세가넘어기로소에들어가고,판중추부사로치사
하여봉조하가되었다.기로소란태조때경로,예우를목적으로설치한것으로정2품이상의벼슬
을한사람으로70세이상이되었거나임금도연로하면들어가는관청서열로는으뜸이다.시호는
정헌(靖獻)이다.묘소는신암면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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