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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박천주
朴天籌
< ? ~ ? >
조선 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절의(節義) 권(權)의 후손이다. 자는 운재(運哉), 호는 설계
(雪溪)다. 효성이 지극해서 부친의 병환에 대변의 맛을 보면서 손가락을 끊어 피를 약으로 바쳤다. 부친상
을 당하여 죽을 마시면서 시묘하였고 3년 동안을 한결같이 아침저녁으로 호곡하였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전례대로 행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묘소를 시묘동(侍墓洞)이라고 일컬었다.
[28] 박홍
朴弘
< ? ~ 1598(선조 31년) >
조선 중기의 충신이다. 아산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장검을 만들어 칼날에다「단심보국(丹心報國)」
네 글자를 새겨 둘러메고 선조가 계신 행재소(行在所)를 향했다. 북상하던 중에 경기도 고양 땅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그들을 물리쳤다. 다시 의주를 향해 가던 차에 선조가 환도하게 되자 중지하고 돌아왔다. 뒤
에 이순신 장군의 진중으로 자진 입영하여 시종일관 최후까지 용전한 맹장으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29] 배씨
裵氏
< ? ~ 1874. 5. 19 > - 하충수의 처
조선 말기의 열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당진 면천(沔川) 평강리에서 생장하여 아산 현내면 운정리
(현재 영인면 신운리)의 하충수(河忠秀)와 혼인했다. 시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바치면서 신혼생활을 하
던 중 1874년(고종11,갑술년) 4월에 남편이 병들자 하늘에 축원하고 손가락을 벤 피로 회생시켰으나 마침
내 죽자 음식을 끊고 애통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나 시부모를 위안해 드렸다. 남편 장례를 치르기
전날에 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해 6월에 친정 마을인 면천 평강리 좌상(座上) 김흥서와 공원(公員) 서기서 등 27인이 연명하여 관사
에 열녀 표창을 추천했다. 서울에서 순찰사가 내려오자 면
천군 유생 심재규를 비롯한 44인이 연명해서 순찰사와 면천
군수에게 단자(單子)를 올렸으며 8월에 어사가 왔을 때 다시
상언(上言)했다. 이듬해 7월에 면천군수가 새로 부임하자
44인 연명으로 표창을 추천했고 8월에는 순찰사에게, 이듬
해 12월에 또 암행어사에게 추천하는 등 3년 동안에 무려 7
차례나 간곡하게 추천했다. 아산현에서도 1883년 2월에 암
행어사가 내려오자 유생 윤병순(尹秉淳) 등 12인 연서로 표
창 단자를 아산현감과 암행어사에게 올렸지만 나라에서 아
<열녀 경주 배씨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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