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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산골짜기로 피신하였다가 적병에게 포위되어 핍박을 받게 되자 정절을 온전히 하고 죽었다. 윤복형
(尹復亨)과 이지강(李之綱) 등이 상소하여 정려가 세워졌다. 인주면 해암3리 한절골(한자골)에 있는 묘 아
래에 그의 정려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여흥 민씨 열녀문(정려)>
<여흥 민씨 정려 현판 일부>
[25] 박뇌공
朴雷公
< ? ~ ? >
조선 후기 숙종 때의 효자다. 아산현 사람이며 재인(才人-광대)이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그 아내와 함께
효자·효부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 딸의 신역(身役)이 면제되었다.
[26] 박 씨
朴氏
< ? ~ ? > -황우해의 처
조선 후기의 열녀로 신창현에 살던 황우해(黃禹海)의 처다.
병자호란 때에 적의 기병(騎兵)이 별안간 들이닥쳐 핍박(逼
迫)하려 하므로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아들도 그를 따라 함
께 죽었다. 인조 때에 신창현 대동면 웅산리(현재 신창면 득
산리)에 정려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
다. 그 자리(득백이)에 1878년(고종 15)에 신창현감 심명영
(沈命永)이 세운‘고 황의길 모자 병정( 旌)유허비’
가 있다.
<정려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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