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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청양토박이들의생애사!
다. 그도 국민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당시 중학
교 진학률은 20%로 매우 낮았다. 진학률이 낮은 이유는 당시
중학교는 입시가 있었고, 수업료 부담도 컸기 때문이다. 그에
게는 먼 거리도 문제였다. 중산리에서 중학교에 다니려면 부여
나 정산으로 가야 한다. 중산리에서 부여까지 거리도 멀지만 학
비가 더 큰 걱정이었다. 또한 그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나이 많은 형이 군대에 갔기 때문에 가장의 자리를 비울 수 없
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15세였던 그는
형의 가족들까지 합쳐서 17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가장이 되었
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배움에 목말랐던 그는 17세 겨울부
터 중미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녔다. 학채(학비)는 쌀 2말, 중학
교 수업료에 비하면 적은 비용이었다. 그나마 농번기에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농한기에나 서당을 다닐 수 있었다. 그 때 익
힌 한문실력으로 지금까지 세상을 사는데 어려움이 없다.
농사는 하늘의 일이라 인간이 풍흉을 점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홍수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드는 해에는 부잣집에서
양곡을 빌려서 먹고 살았다. 빌린 양곡을 갚을 때에는 비싼 곱장
계, 즉 빌린 양의 곱절을 줘야 했다. 보리 한 말 빌리면 보리 두
말을 주거나, 쌀 한 말로 갚았다. 그러다가 차차 이자 부담이 낮
아졌다. 곱장계(쌀 한 말을 빌리면 쌀 두말로 갚음) => 5할 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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