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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問 金基永 李永宰 李龍宰 孫華植 安璣容 金敎振 朴載弘 金炯日
院長 南海祐 崇慕?長 高錫喜 總務 金榮煥 財務 任榮澤 監事 金炯日 徐春善
楊宅鎭 南相鎬 金永培 金竟中 徐明善 李悳宰 宋在新 河榮秀 金東榮 金炳台
朴鐘國 曺圭錫 曺龍熙
<번역문>
찬양문
아! 금곡서원은 만치당 김선생과 매죽헌 성선생, 송재 조선생을 제사 지내던 곳이
다. 예전 숙종조 임술년(1682)에 조정리에 처음 세웠는데, 그 후 정묘년(1687)에
금곡리로 옮겼다. 고종 신미년(1871)에는 서원을 모두 철폐하여 폐허가 되는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광무5년(1901)에 사림의 공론으로 그 터에 나가 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광복 후 무오년(1978)봄에 만치당의 후손인 기영, 병량 등이 주선하여 복원되었으
나 동,서재가 두루 갖추어지지 않아 사림들이 한스러워 한지가 오래였다. 다행히도
유교 풍속이 다시 일어나니 채운면 심암리에 심성이 고운 한 선비가 있으니 바로
심은 김기영옹이 이분이었다. 이 분은 경주 사람으로 그 집안에 관직이 대를 이었고
명예로운 분들이 배출되었으니 과연 우리나라에서 번다한 가문이었다.
천성이 온후하고 정직하며 학덕을 갖추어서 예로부터의 예법에 박식하고 시속
일에 밝은지라, 성현을 흠모하는 품성이 독실하면서도 일찍이 문묘의 일을 관장한지
가 여러 해임에 공헌이 매우 많았다. 본향의 유도회 지부장에 추천되었을 때에는
유교의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 물심양면으로 주력하였고, 각 서원의 사당이나 건물에
관한 일에도 협력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본원의 재임을 맡아온 몇 해 동안은 더욱
정성과 힘을 다하여 관의 협조를 얻어내어서 동재와 서재를 새로 건축하고 주변
환경을 한번 갱신하여 정화하였으니 능히 훗날의 귀감이 될 만하니 마땅히 그를
보고 감동받아 본받을 만할 것이다. 여러 선비들의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서 장차
현판을 매달아 그 공적을 기념하려 하니 신임 원장 송당 남해우씨가 나에게 글을
쓰라고 하여 내가 비록 글이 얕으나 성현을 흠모하고 도를 지키려는 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문장의 졸렬함을 잊고 간략하게 쓰노라.
단기 4336년 계미(2003) 삼월 일
편액과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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