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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영의정 이산해가 그의 당호(堂號)를‘충의당(忠義堂)’
이라고 편액 해주었다. 묘는 신창현, 현재의
도고면 시전3리 태산 종중 묘역에 있다.
[20] 남씨
南氏
< ? ~ ? > - 이배하의 처
조선 후기의 효부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우봉(牛峰) 이(李)씨 배하(培夏)의 처다. 남편과 일찍 사별
하고 가난한 가운데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던 중에 시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졌다. 병 구환을 제
대로 못함을 한탄하며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마당에 보리쌀이 떨어졌다. 흩어진 보리쌀을 모아다가 깨끗
이 씻어 정성으로 밥을 지어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그의 효행은 마을 사람들을 통해 널리 알려
졌고 마침내 1822년(순조 22)에 나라에서 효부 정려가 내려졌다. 탕정면 매곡리 맹골에 그의 정려가 남아
있다. 10여 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10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 위로 옮겼으며 현판은 전부터 있던 것이다.
<의령 남씨 정려>
[21] 막개
莫介
< ? ~ ? > - 김석복의 처
조선 후기 인조 때의 열녀로 아산현에 살던 김돌복(金石福)의 처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이듬해인 1637년(인
조 15)에 청군에 의해 나라가 짓밟혔을 때 절개를 온전히 지켜서 정려가 내려졌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맹사성
- 명인편 참조
맹희도
- 명인편 참조
91
이라고 편액 해주었다. 묘는 신창현, 현재의
도고면 시전3리 태산 종중 묘역에 있다.
[20] 남씨
南氏
< ? ~ ? > - 이배하의 처
조선 후기의 효부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우봉(牛峰) 이(李)씨 배하(培夏)의 처다. 남편과 일찍 사별
하고 가난한 가운데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던 중에 시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졌다. 병 구환을 제
대로 못함을 한탄하며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마당에 보리쌀이 떨어졌다. 흩어진 보리쌀을 모아다가 깨끗
이 씻어 정성으로 밥을 지어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그의 효행은 마을 사람들을 통해 널리 알려
졌고 마침내 1822년(순조 22)에 나라에서 효부 정려가 내려졌다. 탕정면 매곡리 맹골에 그의 정려가 남아
있다. 10여 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10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 위로 옮겼으며 현판은 전부터 있던 것이다.
<의령 남씨 정려>
[21] 막개
莫介
< ? ~ ? > - 김석복의 처
조선 후기 인조 때의 열녀로 아산현에 살던 김돌복(金石福)의 처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이듬해인 1637년(인
조 15)에 청군에 의해 나라가 짓밟혔을 때 절개를 온전히 지켜서 정려가 내려졌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맹사성
- 명인편 참조
맹희도
- 명인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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