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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어 아산군지
대신하더니 두어 달 만에 우리 군사는 패하고 원균은 달아나다 죽었으므로
. 충무는 수십 명의 부하와 함께
조정에선 다시 충무로써 통제사를 삼았었다
10여 척을 얻고 여러 군데서 흩어진 군사
말을 타고 순천부로 달려가 병선
30여 척
들을 거두어 난도에서 적을 깨뜨리고 또 벽파정 아래서 적을 맞아
(馬多時)를 목 베자 적들은 견디지 못하고 전
을 무찌르는 위에 적장 마다시
군이 도망하고 말았다
(陳璘)이 광동군사를 유정(劉綎)이 사천군사
무술년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
, 또 등자룡(鄧子龍)이 절강직예(浙江直隸) 군사를 각각 이끌고 연달아 왔
(陳璘)과 함께 진을 합쳤다.
었는데 충무는 고금도로 나가 진린
이때 진린은 진심으로 그 재주와 책략과 기량과 능간에 굴복하여 모든 군
중 기밀을 처결함에 묻지 않는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선조대왕께 아뢰되 ?이
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는 공이 있는 분이라?하고
(顯皇帝)에게도 자세히 아뢰어 충무에게 도독인을 내려
또 저희나라 현황제
. 그러자 이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주게 하였다
(昆陽)과 사천 등지에 진치고 있던 저희 군사들과 약
철병하고자 하여 곤양
속하고 날을 정하여 노량으로 나오는데 충무는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해군을
정돈하고 서로 협력하여 섬멸할 것을 의논한 뒤 그대로 배 위에서 축원하되
?오늘이야말로 사생을 결단하는 날이오니 하늘이여 내게 이 적을 무찌를 수
.? 하고 빌기를 마치자 장수별이 떨어지므로 모든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200여 척을 무찌르
군중이 불길하게 여기더니 새벽녘에 적을 맞아 결전하여
고 다시 추격하여 놓지 않고 따라가 남해에 이르렀을 때 적이 명나라 군사
, 충무는 친히 화살과 포탄을 무릅쓰고 마구
를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지라
포위 속을 뚫고 들어가 싸움이 한창 어울렸을 때 지나가는 탄환에 맞아 돌
54세이었다. 이듬해에 아들 회(?)등이 아산으
아가니 그가 을사생이라 나이
(6년 뒤)에 훈공을 정하여 호를 내리고 증직은
로 모셔가 장사하고 갑진년
. 그리고 싸움하던 터에 사
의정부좌의정덕풍부원군이요 시호는 충무이었다
당을 세워 지금껏 끊지 않고 제사를 받들지마는 어찌 이것으로 그 공훈을
표창하메 족할까보랴
. 우리나라에 인재가 많이 나기로는 목육(穆陸) 시대를 제일이라 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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