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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庵子)에 살며 키웠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잘 성장하고 혼인을 하여 여러 대에 걸쳐 자손이 많이 번창
하였다. 음봉면 월랑리에는 후손이 거의 떠나고 인주면 문방리, 밀두리, 배방읍 북수리, 안성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그의 묘는 음봉면 월랑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6일에 제사를 지낸다.
[94] 전주이씨 이사눌
| 李思訥
<1457년(세조3년)~1519년(중종14년)>
조선 전기의 종친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 회안대군(懷安大君-이방간)파 4세(世)이며 아산시 지역,
온양 용화동 입향조이다. 현재 용화동에 살고 있는 19세(世) 이한구(李漢求, 82세)씨의 15대조이다.
시기는 약 530년 전으로 추정한다.
이사눌의 고조부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증조부는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 ?~1421)이
며 잘 알려져 있듯이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다섯째 아들인 동생 이방
원과 힘을 합쳤으나 1400년(정종2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유배되었다. 이후 그
의 후손들은 한동안 주로 전주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선원록(璿源錄)》
에 등재되지 못했으나 선조(宣
祖)의 전교를 거쳐 숙종의 전교로 1680년(숙종6년) 《선원록》
에 오르게 되었다. 조부는 회안대군의
둘째아들 금성군(金城君) 이선(李善, 1409~1475)이다. 아버지는 금성군의 외아들 장산정(長山正) 이
형(李衡, 1427~1494)이다.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분순부위 유자방(柳自芳)의 딸이다.
그는 이형의 세 아들 완원부정(完源副正) 이사문(李思文), 완계부정(完溪副正) 이사안(李思安), 완천
부정(完川副正) 이사눌(李思訥) 중 셋째아들이다. 호는 죽헌(竹軒)이며 자신대부(資信大夫-종3품 종
친)에 올랐다. 부인은 온양정씨(溫陽鄭氏)로 통덕랑 정교(鄭僑)의 딸이다. 온양정씨와의 혼인으로 인
하여 그가 온양 용화동으로 와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사눌은 외아들 이철(李哲, 1478~1539)을 두었다. 적순부위 증가선대부 이철은 이설(李雪)과 이
운(李雲, 일명 영신暎信, 1528~1590) 등 아들 둘을 두었다. 이설은 후손이 없고 이운에게서 외아들
7세 이한(李漢), 8세 이효정(李孝挺)까지 외아들로 이어졌다. 이효정이 이간(李侃)과 이은(李誾) 등
아들 둘을 둔 이후 점차 후손이 퍼지기 시작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손이 귀한 편이었다.
이사눌과 그의 아들 이철의 묘는 선대의 묘가 있던 전주에 모셔졌으나 지난 1999년에 신인동 입구,
홍거리 동남쪽 산줄기 종산에 옮겨 모셨다. 그 아래에는 원래부터 있던 이효정의 묘와 송악 유곡리,
탕정 명암4리, 온양 실옥리 등에 있던 묘소들을 옮겨 이간과 이은까지 모두 6대 7기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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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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