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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비가 있는 것이 이례적이다. 공덕비는 보통 근무지 관
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서책을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청에세우는것이일반적이기때문이다.
도읍지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면서 제원루에 올
공덕비를 살펴보니 직산 현감과 군수들이 고을은 작아도
라감개무량함을이기지못하여시를남겼기때문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강하고 청렴한 일면을 보니
“제원(濟源)은백제의근원이여기에서시작되었다”는뜻인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직산 현지를 둘러 봐도 악
데,제원루(濟源樓)는직산관아뒤편에있었다.직산관아에
덕한현감,군수가보이지않아다행이었다.
오는 날은 어김없이 제원루가 있던 곳에 오는데 그동안
필자도2007년면장부임후며칠안되어산아래민가에
직산관아에 들렀던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여러 제왕과 당
서불이났는데다행이인명피해는없었다.그날관련부
대 최고의 학자였던 서거정 그리고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서와협의하여재해구호비등행정적지원을마치고관사
중의 한 분인 신흠 등 많은 문무백관이 다녀갔다고 생각
로 돌아와 나의 부덕함이 커서 불이 났으니 주민들이 고
하니 제원루 표지석에 더욱 애착이 가졌다. 그리고 왜군
생하는구나 하고 밤새 잠을 이루고 못하고 모든 일은 주
에게 불타 없어진지 400여년이 지나도록 제원루 방치에
민을위해오늘이마지막이라생각하고나의정신적변화
대한후손의죄책감이랄까이러한사실을알고있는필자
를 만들어 준 화재사건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면장
에게는더욱미안한마음이들었다.
이 이럴진대 시장이나 도지사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클까
지금은 제원루 복원을 위하여 관계기관에 건의하고 있으
생각하니 직산현 관아에 있는 공덕비를 세워준 현감들이
며, 복원하여 백제의 첫 도읍지 상징물 중의 하나인 제원
훌륭하게느껴졌다.
루모습을보고싶은마음이간절하다.
백제근원이되는누정인제원루
백제시조온조왕사당
1597년 왜군은 재차 조선을 침략하고 진주성과 전라도
2010년 공주?부여에서 세계 2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지역인 남원성을 함락하면서 호남지역을 점령하였고 파
개최한 세계 대백제전 행사시 “백제 혼불을 백제의 수도
죽지세로 충청도 직산 까지 올라 왔다. 왜군은 직산 전투
가 있었던 공주, 부여, 서울 송파구에서 한 후 부여에서
에서 패하면서 퇴각시 제원루와 온조사당을 불태웠으니,
혼불을합친다”라고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원루가 언제 지었는
당시필자는충남도청에있었는데이사실을알고대백제
지알수없으나1476년(성종7년) 이전에건축한것임은틀
추진위원회 관계관에게 전국 유일하게 실존하는 위례산
림없다.
성이 있고 『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왜냐하면, 서거정(1420~1488)이 1476년도에 『삼국사절요』
각종역사서에고려에서조선시대까지백제의첫수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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