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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에는‘가운데 비석은 1546년 명종 원년에 세운 것이고 우측의 비는 가운데 비의 신비(
1711년 숙종 37년에 예조참의 송징은에 의해 다시세워진 것’
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로
두 비가 서로 뒤바뀌었음을 비문을 통해서 확인 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지비 비문내용 (전면) 君
(후면) 嘉
○ 가봉비 비문내용 (전면)
(후면) 嘉
○ 중수비 비문내용 (전면)
(후면) 嘉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최초로 태봉 조성과 더불어 아지비(사진상 왼쪽 비석)가 세워졌고 명종이
왕위에 등극하면서 가봉비(사진상 오른쪽 비석)가 세워졌으며 마지막으로 중수비(사진상 중앙에
위치한 비석)의 순서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서산시지를 비롯한 몇 몇 자료에 이에 대한 오류가
발견되는데 조속한 시정이 있어야 하겠다.
3-3) 태봉의 입지선정 원칙과 풍수지리적 접근
앞에서도 언급하 바와 같이 태봉의 입지는,
『세종실록』
에는“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듯 하여야만 길지가 된다.”
라고 하였고,
『태봉등록』
에는“무릇 태봉은
산 정상에 내맥이 없는 곳이며 용호가
마주보는 곳에 써야 한다.”
라고 하였
으며, 『현종개수실록』에는“우리
나라는 반드시 들판 가운데의 둥그런
봉우리를 선택하여 그 위에다가
태를 보관하고 태봉이라...”
하였듯이
태봉지는 볼록하게 우뚝 솟아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형상이어야 한다.
이를 풍수지리학에서는 돌혈(
풍수학상 돌혈 (
)의 구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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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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