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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이르러서야 순교했다.
해미진영에서는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집단처형이 성행했다. 우리는 집단처형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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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처형의 방법과 장소도 다양했다. 해미진영의 순교자
가운데 일부의 신도들은 장독(
)으로 말미암아 해미의 감옥에서 옥사하기도 했다. 또한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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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미 감옥에서 직접 집행되기도 했다.
또한 교수형은 해미의 서문 밖에서 집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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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66년에는 5명의 신도들에게 참수형(
)을 집행하기도 했다.
신도들에 대한
참수형은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 서문 밖에서 집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1868년 5월 3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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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에는 해미천 가에서 신도들을 생매장하여 죽였다.
이와 같은 박해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신도들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 병인교난 기간동
안 이곳 해미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표 2>에 수록된 53명과『성책』
의 4월조에 기재된 34명 중
<표 2>와 중목이 안되는 32명, 그리고『성책』
의 5월조를 통하여 밝혀진 35명의 순교자 가운데
<표 2>와 중복이 안된 32명 합계 117명 정도의 씨명(
)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이 이름을 확실히 밝힐 수 있는 신도들 이외에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을
가능성은 있다. 해미지방 순교자의 숫자가 증가될 수 있는 가능성은『치명일기』
의 기록을 통해
서도 암시되고 있다. 즉 1866년 해미에서 교수형을 당한 손사중은 다른 신도 30여 인과 함께
교수되어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치명일기』
에 5?6인 내외로 나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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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나머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아니하다.
그리고 1868년에 순교한
조유진의 경우에 있어서도“해미 포교에게 잡혀 합 수십여 명이 한가지로 치명하니”
하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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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다. 그러나 1868년 그와 동시에 순교한 다른 수십여 명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1868년 4월 순교한 김춘겸의 경우“해미로 잡혀와 합 네 사람이 한가지로 치명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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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되어 있으나,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순교자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밖에도『치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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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일기』694.
34)
『치명일기』685, 689, 695?7, 709?713.
35) <표 2>의 No. 14, 18, 23, 26, 28, 29, 30, 31, 35, 41, 42, 52.
36) <표 2>의 No. 3.
37) <표 2>의 No. 1, 6, 7, 39, 40.
38) <표 2>의 No. 17, 24, 25.
39)
『치명일기』690.
40)
『치명일기』697.
41)
『치명일기』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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