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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문화원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소담옹기
[1] 효자 강봉수 <姜鳳壽>
1543년(중종 38) ~ 1615년(광해군 7)
아버지를 잃은 후 죽 먹으며 삼년상 치러
조선 중기의 효자이며 온양에서 태어나고 살
았다. 가문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진주 강
씨 집안에서 온양에 처음 와서 살기 시작한 강
자위(姜自渭)라는 분이 증조할아버지이다. 강
자위는 함경도 북청의 판관 벼슬을 지냈다. 할
아버지는 역시 판관을 지낸 강문필(姜文弼)이
다. 아버지는 교위라는 무관 관직을 지낸 강기
(姜琦)이며 어머니는 공주(公州) 이(李)씨이
다. 부인은 죽산(竹山) 박(朴)씨이다. 결혼 뒤
▲ 강봉수의 묘
본명 외에 부르던 다른 이름인 자(字)는 덕수
(德?)고 별도의 호칭인 호(號)는 창암(窓巖)이다. 창암 강봉수는 1573년(선조 6)에 진
사시(소과)에 합격했고 1580년(선조 13)에 문과(대과)에 급제했다. 진산군수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진산(珍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1604년
에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군수(종4품)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임진왜란 때의 공
으로 선무원종공신이 되었고 도승지(정3품)에 추증(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줌)되었다.
1791년(정조15)에 예조참판(종2품)으로 다시 품계가 높아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예와 법도에 따라 장례
를 모셨다. 이후 죽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몹시 슬퍼하여 몸이 많이 상하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기를 삼년을 하루같이 했다. 이를 보고 고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를 칭송했다. 한편 홀로 되신 어머니를 극진히 섬겼으며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또한
아버지 때처럼 예를 갖춰 상을 치렀다.
이러한 효행으로 인하여 1634년(인조 12)에 온양 정퇴서원(靜退書院) 건립 때 그 안에
함께 세운 충효당(忠孝堂)에 이순신, 윤현과 함께 강봉수의 위패가 모셔졌다. 그 후
1666년(현종7)에 당시의 대학자인 송준길(宋浚吉)의 상소로 왕이 강봉수에게 효자 정
려(旌閭)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정려각(정문)이 세워져서 그의 묘가 있는 아산시 배방
면 신흥리 감태기(감탁) 마을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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