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928페이지

891페이지 본문시작

없이살수있다는‘공산주의’사상이들어왔다.마을의학식과견문이있는식자층들이주



로 사상을 접하였으며, 이후 식자층과 생활이 어렵던 사람들이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
6
당’)에많이가입하게된다.나라소식은마을사람들의입에서입으로들으며알게되었는
·
2
5
데,시골이라신문이많이없었으며있어도한자로만되어있어학교선생들도읽기어려워


했다.라디오는당연히구경하기힘들었다.그래도마을에한집씩있는부잣집이라디오를
사용했다.집대문양쪽에큰대나무를세워가운데로구리동선을모아집안으로안테나
를연결해라디오를틀었다.나라정세를신문과라디오로접할수없었던박종엽씨와대
부분 사람은 전쟁(6·25) 소식을 당시 역마차를 운영했던 심원보 씨에 의해 알게 되었다.
심원보씨는안흥신진항에서태안읍내로6명이탈수있는마차를하루2회운행했는데,
가격이 비싸서 일반사람들은 이용 못 하고 신진항에 밀수로 돈을 많이 번 졸부들이 주 고
891
객이었다.당시왕복비용이열(10)식구의일주일식량값정도였다.
그렇게심원보씨는개전다음날(월요일)역마차를몰고오다가등교하는아이들을발
견하고‘학교가지말라.난리났다.북한놈들이쳐들어왔으니까,가지마라.’라고말해마
을사람들도알게되었다고한다.라디오를가진부자들에게들은소식을전한듯싶다.
구술자가족의고초
구술자집안은전쟁이터지고고초를겪었다.당시그의작은아버지는경찰관이었는데,
홍성경찰서의 보안주임으로 근무 중 전쟁이 터져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고 낙동강으로 후
퇴하여그지역에서전투에참여했다.미군합동작전으로공도세워훈장을받기도하였으
며수복후홍성으로복귀하였다고한다.그때그의집안은경찰집안이라는이유로,보리
밥이라도 먹고 살던 집안의 식량을 다 빼앗겼다. 그래도 평소 인심이 좋아서인지 마을 아
주머니들이보리,밀두되박을치마폭에싸와서밤에몰래문앞에두고갔다며그는인
심을잃지않았나보다하고생각했다.그렇게맷돌에갈아죽을쒀서수복될때까지할머
니, 큰어머니, 어머니와 생활하였고 위험에 노출된 큰아버지는 남면 울미섬으로 아버지는
가의도로피신해있었다.
북한노래가적힌수첩으로인한한티재사건희생자

891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