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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출과가뭄으로인한어려운생활

남,
박종엽 씨는 1940년생으로 근흥면 도황리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안흥초

등학교를 나왔고 중학교는 서산, 고등학교는 공주에서 다녔다. 6·25전쟁 당시 구술자는



안흥초 4학년 재학 중이었다. 그의 집안 형편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어려웠다. 일본인들의


수탈정책으로공출이내려져온갖쇠붙이를빼앗아가는데집안수저까지도남김없이앗


아갔다.그래서바다인근사람들은바닷가에서주워온조개껍데기로숟가락을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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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먹었고또한,항공유재료를확보하기위해집마다할당량을주어송진(송탄유)을공
출하게하였다.관솔(송진이얽혀있는소나무가지)을20L짜리페인트통에뒤집어도쏟아
지지않을정도로꽉채운후땅을파서다른빈통을넣고그위에관솔을채운통을엎어
놓는다.엎어놓은통위로흙을살짝바르고왕겨(벼겉껍질)로주변을덮어하루이상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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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때면얽혀있던송진이녹아아래로흐르게하여모았다.
안면도에서는큰소나무가많아톱으로상처를내어송진을뽑았는데소나무가작은근
흥면에서는이러한방식으로송탄유를모았다고한다.당시5~6살어린나이였던그의손
에도작두가들려있었고작업하다가많이다쳤다며선명한상흔을보여주며속상함을내
비쳤다. 거기다 개전(6·25전쟁) 때까지도 가뭄이 심해 흉년이었는데, 논에 물을 못 댈 정
도로 가물어서 모를 옮겨심지 못해 모판에서 이삭이 날 정도였으며 말복 때까지도 못 심
었다한다.
옷은여름에는잠뱅이(삼베),겨울에는솜바지와짚신을신고다녔다.고무신은귀했는
데,마을에군산만월표고무신이배급나와2켤레씩받기도했다.다받지는못하고경쟁
이치열하여사람들이모여서제비뽑기로나눠가졌다.박종엽씨도배급받은적이있는데
아껴 신기 위해 사람들 없을 땐 맨발로 다니고 사람들 볼 때만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
고여름철에는일본인들이신고다닌엄지와검지발가락사이끼워신는조리가있었는데
비슷한형태로볏짚으로바닥을만들고가운데구멍을뚫어끈을양쪽으로달아서만들어
신었다.우리말로솔이라고불렀다.
역마차를통해들은개전소식
이렇게 대부분 마을 사람이 살기가 어려웠었을 당시, 마을에는 공동 분배로 빈부 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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