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52페이지

89페이지 본문시작

선성군 이무생(李茂生)은 조선 제2대왕 정종의 아들 17명(15군) 중 넷째 아들이다. 이무생이 파조
(派祖)로서 선성군파의 1세(世)가 되며 2세 도성수(陶城守) 이천정(李千丁), 3세 복흥령(復興令) 이미
수(李眉壽), 4세 의령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로 이어져 5세 의령도정(義寧都正) 이춘영(李春英,
1563~1606)에 이르게 된다. 의령도정이 그의 조부이다.
아버지는 병자호란(1636~1637) 당시 남한산성으로 왕(인조)을 호종하고 후에 소현세자와 봉림대
군을 모시고 청의 심양에 가서 8년 동안 고생을 하고 돌아왔으며 후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에 책훈된 일초정(一草亭) 이시재(李時材, 1588~1661)이다.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충무공 이순신의
중형(仲兄)인 이요신(李堯臣, 1542~?)의 딸이다. 아버지의 묘는 경기도 양주에 있지만 어머니 덕수
이씨의 묘는 마을의 서남쪽, 국사봉 동남쪽 기슭에 있다.
이만장은 11남 1녀 중 여섯째아들이다. 자는 여전(汝全) 호는 정립헌(正立軒)이다. 진사로서 의금부
도사를 거쳐 통정대부 행 덕원부사를 역임했다. 족보의 기록대로라면 그는 무려 104세까지 살았으나
부인 강릉김씨 현감 김재탁(金在鐸)의 딸(1616~1678)과의 사이에 2남만을 두었다. 그가 언제, 이곳
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 덕수이씨의 사패지였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전해진다. 병자호란
(1636)을 전후한 때인 대략 350년 전의 일로 추정한다. 참고로 그의 셋째 형님인 이정장(李井長)은
아산시 송악면 강장리로 들어가 터를 잡았다.
이만장의 두 아들 중 장남 익보(益寶)는 조졸한 듯하고 차남 익서(益瑞, 1678~1729)가 제창(濟昌),
택창(澤昌), 정봉(廷鳳) 등 세 아들을 둔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까지 이어
져 왔다. 그의 묘는 마을 뒷산, 국사봉 동남쪽 자락에 부인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는데 그 근처가
처음 와서 자리 잡은 곳이라 전해진다. 지난 2005년에 납골묘를 조성해서 새로 모셨다.
[93] 양성이씨 이복
| 李複
<1659년(현종즉위년)~1709(숙종35년)>
조선 후기의 인물로 양성이씨(陽城李氏) 17세이며 상서공파(尙書公派) 음봉면 월랑리 입향조이다.
아버지는 이복양(李復陽)이고 어머니는 원주(原州)이씨(李氏)로 이유중(李有中)의 딸이다. 부인은 전
주이씨(全州李氏)이며 이상질(李尙質)의 딸이다.
이복(李馥)은 원래 안성에서 부유하게 잘 살았으나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그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는데 유모가 돌도 안 된 그를 포대기를 싸안고 음봉면 월랑리로 와서 어느 암자
89
아산입향조 |

89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