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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주호
金周鎬
<1838. 11. 1 ~ 1909. 2. 26>
조선 말기의 효자로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영인면 상성리에서 환(煥)의 4남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어
려서부터 마음이 착하여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17세의 젊은 나이로 남
편 김기택(金基宅-그의 먼 일가)과 사별하고 청상이 된 문화 유(柳)씨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어머니는 성
격이 유별나게 까다로워 마음이 불편한 일이 있으면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곤 했다. 그러면
그도 어머니 마음이 풀릴 때까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 마음을 풀어드리곤 하였다. 돌아가실 때
까지 그렇게 하면서 32년간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또 숭조(崇祖) 정신이 투철하여 명절이나 제
사가 돌아오면 전답까지 팔아 가며 제사를 올려 넉넉하던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그 효행이 인근 마을까
지 소문이 나 칭찬이 대단하였다.
[15] 김현
金鉉
<1595(선조 28년) ~ 1637년(추정) >
조선 중기의 효자로 본관은 김해이다. 충간공(忠簡公) 보(普)의 8세손이자 김해 김씨 아산 입향조 증 좌
참찬 합( )의 6세손이다. 종(琮)의 손자이고 제용감봉사 인지(仁祉)의 아들이다. 자는 왕이(王耳)다. 효성
과 우애가 뛰어났고 경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나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처사로서 깨끗한 선비의 지
조를 지켰다. 어머님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날마다 성묘를 했고 계모를 맞아 생모처럼 효성
으로 모셨다. 병자호란 때(1636년) 병든 아버지를 업고 수원지(현재 아산시 관내이지만 당시 수원부에 소
속되었던 지역)인 지금의 인주면 걸매리까지 피난을 왔다가 적군을 만났다. 적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
므로 자신의 몸으로 아버지 몸을 감싸 안고 대신 칼에 맞아 죽었으며 아버지는 목숨을 구했다. 오랜 뒤인
1675년(숙종 원년)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를 명하니 음봉면 송촌리에 정문이 세워져서 지금까
지 전해진다. 1829년(순조 29)에 대학자인 전재 임원회(任憲晦)가 지은 정려기가 남아 있다. 묘는 음봉면
동암1리 김해 김씨 종산에 있다.
<김현의 묘>
<김현 효자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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