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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면의이주와정착



태안읍남문리에서아버지지경순(호적상지춘선)과어머니박씨사이에서태어나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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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서 31세까지 생활했다. 일제강점기에 아버지는 태안 소재지에서 쌀장사하였으며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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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매는9남매로큰형님과누님을제외하고본인어머니슬하에는7남매이며현재94세


의누님이생존해계신다.
31세에 결혼하고 소원면 의항리에서 간척사업을 한다는 소식에 원조받은 밀가루를 품
삯으로 받으며 일했다. 당시 품삯은 20킬로그램에서 2~3킬로그램을 제외하고 18킬로그
램정도받았으나품삯이적어서일을포기하고소원면야산에서더덕,방풍,하수오등을
캐서말린후1주일에한번씩홍성조양문앞에있는건재국(약초상)에판매했다.그때마
다쌀1말에서한가마니까지받을수있었다.2년간작업을했는데하루일당으로계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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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당시모심는인건비의3배정도수익이났다.
바다에서 줄에다 포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굴 양식도 시도했으나, 당시 간척사업을 했
던망산간척지(신덕리-의항리)가완공되고서서히농사를지을수있게되면서정착하게
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으며 30대 중반에 간척지에서 벼를 생산할 수 있었는데
목탄버스를타고서산의오남리방앗간에가서벼100가마니값을미리받아가져오기도
했다.당시(1960년대말~1970년대초)벼1가마에8,300원이었던것으로기억한다.
일제강점기이후해방된상황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2년 정도 다녔는데 일본어를 매우 잘했지만, 해방 후에 제대로
복학하지못해서배움이짧았다.큰형님은북해도탄광으로5년간징용을가서매달일본
돈을보내줘서가계에큰보탬이되었다.일본돈은돈냄새가특히많이났다.아버지가해
방 전에 52세로 돌아가시고 형님이 일본에서 돌아와 징용 가서 보내준 돈 문제로 어머니
와다툼이있었던기억이있다.
아버지가중학교옆밭2자리에참외를심었는데대낮에도여우가참외를파먹으러내
려오기도했다.해방후에모랭이재넘어원북가는길에논9마지가있었는데2~3년후형
님이 4마지기를 팔았던 기억과 동·남문리 4개 마을의 똑똑한 청년들이 남로당에 가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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