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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저항하고, 또 북한과 연계관계가 없자, 자생적 공산주의자 조직이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이런 김승훈 신부님을 구속 이후 다시 뵙게 된 것은 검찰의 취조과정에서 서소문
검찰청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였습니다. 신부님과 어머니, 가족들이 서 있었지요.
검찰이 가족의 접견을 가로막을 때도 김승훈 신부님이 앞장서서 싸우셨고 경찰로
부터 봉변도 당했지요. 그렇게 김승훈 신부님은 나의 어떤 형님들 못지않게 민주화
대의에 앞장섰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나 내가 까막소를 나올 때까지 어머님을 지켜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김승훈 신부님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평생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으셨지요.
까막소에서 7년 4개월을 살고 88년 10월에 개천절 특사로 나올 때 신부님은 왕
십리 성당의 신부로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김승훈 신부님의 어머님이 계셨는데 저
희 어머니를 정말로 친딸처럼 모든 걸 챙겨주셔서 다른 신도들의 시샘도 많았지요.
어머니도 친정어머니 못지않게 섬겼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황인철 변호사를
대부로 모시고 미뤘던 영세식을 왕십리 성당에 서 가졌습니다.
1989년 초에는 신부님 어머님이 참석하여 심복자 동지와 평생 부부로 살겠다는
약혼식을 가졌고 그 뒤로 6월3일에 신부님 주례로 혜화동 성당에서 혼배식을 치렀
지요. 그 이후에도 각종 미사에 참석하고 신부님이 여의도성당으로 옮겨가시거나
금천구의 독산성당으로 가셨을 때도 이런저런 사회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부님에게 각종 사회문제 특히 노사관련문제들이 쏟아졌지요. 신부님
은 힘들법한데도 여전히 가리지 않고 총대를 메었습니다.
내가 갑작스럽게 청와대에 가게 되어 신부님은 노동계가 주장하는 노동사범의
전원석방을 요구하셨는데, 주무 수석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석방 요
건이 되면 석방시키려 애썼지만, 집시법 위반이 공공연하게 벌어져 가능하면 구속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겨났지요. 단병호씨 문제가 그러했습니
다. 집행유예기간이니 불법집회를 하면 정부도 어쩔 수 없다고 사전에 통고까지 했
는데도 너희들이 잡아갈 수 있으면 잡아가라는 듯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구속시켜 잔여 형기를 살도록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승훈 신
부님을 내세워 석방 요구를 해왔습니다. 신부님은 곤란한 내 입장을 아시고 비서실
장에게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셨죠. 그 때는 신부님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있어
서 정말 큰 일 나겠다 싶었지요. 김대중 대통령께 면담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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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향토문화(洪州鄕土文化)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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