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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리고 곧 남편의 뒤를 따라 죽으려 하다가 그 시아버지를 보호할 사람이 없으므로 조석으로 지극
한 정성과 공경심으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5~6개월이 지나고 시아버지의 마음도 점점 안정되어 가자
드디어 약을 먹고 자결하니 고을의 사대부들이 이구동성으로 포상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12] 김익생
金益生
<1388(고려 우왕 14년 ~ 1450(세종 32년)>
조선 초기의 무관·효자로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고려 말의 절의로서 조선 건국 후 도고산에 은거한
질(秩)의 아들이다. 자는 정부(靜夫), 호는 성재(省齋)이다. 1421년(세종 3) 남포진 병마절제사(籃浦鎭兵馬
節制使)를 거쳐 좌군동지총제·강계 절제사(江界節制使)를 역임했다. 1428년(세종10)에 중국 명나라의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우군총제(右軍摠制)·경상도도
절제사·중군총제 등을 거쳐 1432년(세종 14)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하정사(賀正使)로 또 북경
에 다녀왔다. 그 후 충청도 병마도절제사·한성부윤·경상좌도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동지중추원사(同
知中樞院事)를 지내고 1440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제수되었다. 1443년(세종 25)에 다시 중추원 부
사(中樞院副使)에 올랐다. 경주부윤 시절에 빈현루(賓賢樓)를 짓고 강무소로 삼았는데 이 때 안평대군이
편액을 쓰고 정인지가 기(記)를 지었다. 그의 딸이 순천 박씨 중림(仲林)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이다.
그가 일곱 살 때 병을 앓던 어머니가 한겨울에 잉어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어떻게 하면 잉어를 구할
수 있을까 걱정하다가 꿈을 꿨다. 꿈에 나타난 사람이 가르쳐 준 연못을 찾아갔더니 연못 위의 얼음이 갈
라지면서 커다란 잉어가 튀어나왔다. 잉어를 갖다 드려서 어머니 병을 고치게 되었다. 1405년(태종 5년)
에 효행으로 효자 정려를 명하여 도고면 도산리에 정문을 세웠으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묘도 도산리
부친의 묘 아래에 있다.
<김익생 효자 정려>
<김익생의 묘>
[13] 김종
金琮
< ? ~ ? >
조선 중기의 문신·효자다. 자는 여종(汝宗)이고 본관은 김해이며 공신 윤(胤)의 후손이다. 1567년(명종
22)에 식년시에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효행이 특히 뛰어났으므로 천거되어 효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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