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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벼 한 가마니는 1원으로 기억하며 구술자는 초등학교 3학년 나이에 8.15 해방이 되

남,
고 중학교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바로 위 형님(2남 이


△△)과함께서울에서고향으로피난왔다.


당시아버지는마름일하면서농사를짓고있었는데일꾼을3~4명정도부리는부유한


생활을하고있었다.


당시 일꾼을 머슴이라고 불렀는데 품삯은 1년을 기준으로 일을 잘하는 상머슴은 벼 15

5
섬, 중 머슴은 13섬, 11섬, 하 머슴은 9섬, 7섬의 품삯을 받고 옷도 3벌 정도 해주고 버선
도제공하고숙식도해결해주었다.숙식하는과정에서저녁에는볏짚일을하기도했다.
6.25전쟁이시작되면서좌·우익에대한개념이생기고갈등이시작되었다.실제로전쟁
이일어난것은서울에있을때휴전선과가까웠기때문에포성을듣고알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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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에서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인민위원회와 위원장도 있었다. 남로
당전체는보도연맹에가입되어주로지식인들이많았다.
전쟁직전에남로당에가입했다가전쟁이일어나자보도연맹으로관리되던사람들이백
화산한티재에서학살당했는데이원에서도10여명이좌익으로끌려가학살당했다.당시
주민들이존경하고따랐던사람들도많이있었으나경찰의시책으로모두학살되었다.그
래서인민군치하에서피해자의유족이우익에가담한사람들에대해인민재판을하고살
해하면서좌·우의감정대립으로많은인명피해가생겼다.특히,태안군에서는소원면,이
북면(이원면)이더심했는데,연계된주동인물이많았기때문이다.
전쟁전에경비대에지원해서입대한사람이이원에서도5~6명정도있었고,전쟁중에
인민군의용대를지원해서갔다가패퇴해서다시돌아온사람도5~6명되었다.이사람들
은거제도포로수용소에수용됐다가귀화자(반공포로)로분류되어다시국군으로입대한
사람도있고6.25전쟁때좌익으로몰려희생된사람도있었다.
인민군주둔당시상황
1)서울에서의상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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