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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소시민세력 중심이 아니라 생활에 기반을 둔 세력의 조직화에 있으니 나는 당
신들과 뜻을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만남이 있은 뒤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이 터지고 곧이어 10·26사건이 났고 남민전 사건도 요란하였지요.
나도 붙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지만 신향식 선생 쪽 사람들이 나에 대한 설득에 실
패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한 문서가 정보기관에 이미 압수되고 난 뒤여서 간단한 진
술로 끝이 났지요.
10·26 이후 서울의 봄 국면이 되자 김승훈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온갖 세력이
지상에 몰려나와 꿈틀거렸지요. 하지만 신군부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선거를 통해 정권을 넘겨주거나 타협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저는 보았습니다. 신군
부의 재등장에 최대한 타격을 주고 국민들의 민주화의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을 잘
조직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공개 반합법(半合
法)의 조직을 몇 개 만들어 대응하면서 전국의 복잡한 운동권 내부의 상황을 돌파
하기 위해 골몰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광주를 제외하고 보안사건을 우려해 학생
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전면에 내걸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드러난 것이지만, 우
리가 아무리 학생들의 헌신과 희생이 민주화의 이정표를 세운다고 얘기했어도 그
들은 이미 보수야권의 지도력에 흡수되어 운동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뒤였지요.
광주조직의 책임자였던 윤상원 동지만 전남도청에서 신군부세력의 총과 화염방
사기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을 막지 못하면서 신군부의 등장은 예
상된 수순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역 회군을 주장한 자들은 보수야권의 선거론에
빠졌던 몇몇 복학생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이 학내지도부를 움직였습니다. 이 학내
언더지도부는 무림세력이었지요. 땅을 치고 통곡 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윤상
원 동지의 죽음을 안고 우리는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독려했습니다. 학생조직도 만들어져 전국적인 투쟁이 벌어지고 때때로 나는
동대문성당에 나가 혼자 기도를 드렸습니다. 신부님도 한두 번 뵈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시는지도 몰랐습니다.
1981년 6월에 내가 남영동 치안본부분실에 잡혀 갔을 때 처음에는 김승훈 신부
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며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또 윤보선 전 대통령, 김찬국
연대교수, 김승훈 신부 등이 관여한 최대의 시국사건 조작 시나리오는 나의 저항도
있었지만 학생연맹과 노동자연맹이라는 조직실체가 드러나면서 저들은 수사방향을
틀었습니다. 월북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엄청난 고문을 가했습니다. 제가 필사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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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향토문화 회원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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