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94페이지

87페이지 본문시작

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야곡 조극선의 생애와 『인재일록』·『야곡일록』의 의의
2) 학행으로 사환
직인 사업에 천거된 것은 그가 학덕을 갖춘 산림으로 중망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3)
1634년(甲戌: 40세) 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9월에는 공조정랑(工曹正
1623년(癸亥: 29세)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으로 집권하게 된 서인정권은 새로운 인물을 확
郞), 겨울에는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제수 되었다. 1635년(乙亥: 41세) 군기시첨정으로 재직 시
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인망(人望)이 두터운 인물을 선발하여 재주가 수령을 감당할 수 있
영의정 오윤겸의 추천으로 군물의 포쇄작업을 마치고, 면천군수(沔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조극선은
거나 학행이 있어 곧바로 6품에 서용할 수 있는 28인을 선발하였는데, 이미 학행이 널리 알려져 있
부임길에 아전들이 아산의 빙령(氷嶺)을 넘으면 불길하니 우회하자고 하는 말이나, 관아에서 전관
던 조극선도 선발 되었다.
40)
이 죽어 귀신이 있다고 하는 헛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목민관으로 이속은 엄히 다
조극선이 사환을 시작한 것은 1624년(甲子: 30세)부터 이었다. 이해 정월에 스승 이명준을 광정(
스리고 백성들은 잘 무휼(撫恤)하였고, 재판에 있어서는 법에 의거하여 흔들림이 없이 했으므로 화
廣亭)으로 찾아뵈었고, 2월에는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온 국왕을 근왕(勤王)하였다. 여름에 조
강(豪强)들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은 기뻐하였다고 한다.
익은 “오늘날 독실히 학문하는 선비 가운데 조극선의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천거하여 동몽교관에
1636년(丙子: 42세) 6월에 완성군 최명길은 박지계의 문인 조극선은 가장 어질다는 이름이 있어
제수되었다. 그러나 조극선은 나이가 젊어서 남의 스승이 될 수 없고, 어버이를 멀리 떠날 수 없다
진신 사이에도 알려진 자로 부서(簿書)의 직임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44)
12월에 오랑캐 군대가
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박지계는 “관직의 이름이 동몽교관이니 어찌 나이가 젊음을 혐의할 것이 있
크게 쳐들어와서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조극선은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인민이 이미
겠는가”라고 권유하였고, 조익도 상경할 것을 재촉하자 조극선은 입조하여 동몽교관직을 수행하였
흩어지고 고을과 마을이 텅 비어서 실패하였다.
다. 그러자 조익은 제일 먼저 자기 자제를 보내어 배우게 하였고, 조극선도 몸소 솔선하여 예를 수
이상에서처럼 조극선은 162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으로 사환을 시작 하였고, 이후 종
행하고, 제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41)
부시주부, 공조좌랑, 익위사사어, 공조정랑, 군기시 첨정, 면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관직은
1627년(丁卯: 33세)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강도(江都)로 행차하는 인조를 호종하였고, 6월에 종
조익과 최명길에 의하여 천거된 것이었고, 학식과 덕망으로 익위사사업과 같은 산림직에 제수 되기
부시주부(宗簿寺主簿)로 승진하였다. 이때 종친의 후손 중에 난리를 틈타 적모의 상중에 장가든 자
도 하였다.
를 종부시 제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치죄하여 종실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9월에는 흥경원(興慶
園) 천장(遷葬) 때 배향(陪行)한 공이 있던 신하들을 논상할 때 식재관(拭梓官)이었던 조극선도 직
3) 지방관으로 경륜을 펼치던 시기
급을 올려 서용되었다.
42)
1628년(戊辰: 34세) 8월에 공조좌랑으로 옮겼다. 일찍이 상참(常參)에 입시하여 본조의 누적된
조극선이 면천군수에서 물러난 1636년 10월부터 1648년에 온양군수에 부임하기까지 약 12년 동
폐단 20여 조항을 조목조목 아뢰어 혁파하라는 비답을 받았다. 12월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부모
안은 특별한 사환이 없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1638년부터 병환을 앓던 부친이 1639년 고종명하여
를 봉양하였다.
삼년상을 치르는 등 향촌에서 독서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1642년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었던 『삼
1632년(壬申: 38세) 5월에 예판 최명길의 천거로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다. 본래 최
관기』, 『잡기』 등을 저술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때에 『주역』과 예학 공부에 주력하였으
명길은 조극선을 사업(司業)으로 천거하였으나, 인조가 새로 제도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여기자, 한
며, 학문적 소신이 뚜렷하여 비록 스승의 학설이라도 무조건 따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45)
1645년(
산직에 제수하여 도성 안의 선비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여 실력을 닦는 효과가 있게 할 것을 청
乙酉; 51세) 순창군수(淳昌郡守), 1646년(丙戌: 52세) 형조정랑(刑曹正郞)과 익위사사어, 1647년(丁
하여 익위사사어에 제수된 것인데, 곧바로 6월에 익위사익위로 제수 되었다. 이처럼 조극선이 산림
亥: 53세) 병조에서 발관(發關)한 일이 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46)
43) 김학수, 앞의 글, 16쪽. 
40) 『야곡집』 권 11, 연보 계해조. 
44) 『인조실록』 권32, 인조14년, 6월 11(갑신)조. 
41) 『야곡집』 권 11, ‘연보’ 甲子條:. 『약천집』 권22, 「장령조공행장」. 
45) 김학수, 앞의 글, 17쪽. 
42) 『인조실록』 권17, 인조 5년 9월 16일(기묘)조 
46) 김학수, 앞의 글, 17쪽. 
86 ?
? 87

8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