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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남혁
金南赫
< ? ~ ? >
조선 후기의 지사(志士)다. 본관은 김해이며 효자 현
(鉉)의 아들이고 자는 여회(汝晦)다. 부인은 청주 송(宋)
씨이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고 가정의 법도를 엄히 지
켰다. 병자호란에 그의 부친이 적에게 피살되자 어린
나이로 망극해 하면서 상례를 치렀고 평생을 통한하여
삼년의 추복(追服)을 입었다. 그 후 원수를 갚기 위해
변발(編髮)을 하고 두 차례나 심양(瀋陽-선양)에 들어
갔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한을 안고 돌아온 뒤 과
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은일(隱逸)로 지냈다. 문장과 학문
으로 이름을 떨쳤다. 묘는 음봉면 동암1리 김해김씨 묘
<김남혁의 묘>
역에 있다.
[9] 김소사
金召史
< ? ~ ? > *소사는 과부를 뜻함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열녀다. 남편이 죽자 열흘간을 먹지 않고 굶어서 목숨을 끊었다. 1729년(영조 5,
기유년)에 신창현 대동면 웅산리(아산군 신창면 득산리)에 정려를 세웠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0] 김소사
金召史
< ? ~ ? > - 김한성의 처
조선 후기의 열녀로 아산현 일동면(현 아산군 음봉면) 김한성(金漢成)의 처다. 부군이 사망하자 부친이
딴 남자에게 개가시키려 했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군의 뒤를 따라 죽으려 하니
시부모가 경계하여 말하기를“네 남편은 이미 죽었으나 다행히 아들 하나가 있으니 네가 목숨을 보전하여
어린 고아를 길러 네 남편의 뒤를 계승하도록 하여야 하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슬픈 얼굴을 감추고 시부
모 봉양을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뒤에 그 아들이 요절하고 시어머니도 죽으니 가사를 손아래 동서에게
전해 주고 약을 마시고 죽었다. 선비 임거보(林擧寶)가 관부에 보고했다.
[11] 김소사
金召史
< ? ~ ? > -최지영의 처
조선시대의 열녀다. 아산현 현내면(縣內面) 최지영(崔志永)의 처다. 성혼은 되었지만 아직 시가에 가기
도 전에 부군이 죽고 동시에 자기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이에 그 부친이 말하기를“네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겠느냐, 아니면 네 남편의 상사(喪事)에 가겠느냐?”
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제 남편은 이미 죽어서 사
체가 방을 나가지 않았으니 제가 간다면 저는 시집 사람이 된 것과 같지만 제 남편의 장례가 끝난 뒤라면
누구를 의지하여 시집을 찾겠습니까?”
하고 곧 저녁에 시집으로 달려가 남편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통곡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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