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16페이지

86페이지 본문시작



禮山의
김진규(金鎭圭)(1658~1716)
김진규가 덕산 현지 석문담과 와룡담에 새긴 글씨들
조선후기의문신으로자는달보(達甫),호는죽천(竹泉),본관은광산(光山)이며영돈령부
사만기(萬基)의아들이며인경왕후(仁敬王后)의오빠이고송시열의문인이다.
1682년(숙종8년)에진사시에합격하고1686년(숙종12년)에정시문과에장원하여이조좌랑
을거쳐1689년(숙종15년)기사환국으로남인이집권하면서거제도로귀양갔다가1694년(숙
종21년)에갑술환국이일어나서인이재집권함에따라지평으로다시기용되었다.
그러나이듬해에소론인남구만으로부터척신(戚臣)으로서궁중출입이잦고월권행위가많
다는탄핵을받고삭직되었다.1699년에는스승을배반하였다는명목으로윤증을공박하여
물의를일으켰다.1701년대사성을거쳐1706년(숙종36년)에병조참판에이르렀다가소론
에 의하여 유배당하여 2년 뒤 풀려났다. 1710년 대제학에 오르고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
되었으며그밖에도홍문관의여러관직과사인,빈객,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여러관직을역임하였다.
문장에뛰어나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를많이작성하였으며,전서,예서및산수
화, 인물화에 능하여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
도 하였다. 그의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와 “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
가있다.정치적으로는대표적인노론정책으로서스승인송시열의처지를충실히지켰다.거
제의반곡서원(盤谷書院)에제향되었으며시호는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76년 치제(致祭)하였으며 1773년 그 문집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친제
(親製)하였다.문집으로는??죽천집??편서로여문집성(儷文集成)이전한다.
김진규가 예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덕산현으로 귀양을 오면서 부터이다. 덕산현지에 와룡
담,석문담에김진규가글자를새겨놓고세이암이란글자도김진규가모사체로써놓았다고
기록되어있다.세이암이란고운최치원의글씨는김진규의모사체인것이다.김진규는덕산
86

86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