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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야곡 조극선의 생애와 『인재일록』·『야곡일록』의 의의
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명준에게도 화가 미치게 되자 조극선은 선생을 찾아뵙고 돌아왔다.
18)
1616
승자이었다.
24)
따라서 사우관계도 박유근(朴由近), 유연(由淵), 조진양(趙進陽), 복양(復陽), 윤상거(
尹商擧), 윤선거(尹宣擧), 권시(權?), 민광소(閔光?), 민기수(閔祺壽), 이칭(李秤), 박승휴(朴承休),
년(丙辰: 22세)에 조극선은 이명준을 유배지인 영덕으로 찾아뵈었다. 이때 이명준은 더 이상 조극선
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을 찾아온 조극선를 위해 잠야 박지계와 포저 조익을 찾
심지호(沈之灝) 등 학통상으로는 우계학파이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소론) 등이었다.
25)
아가 배우기를 권유하면서 소개하는 편지를 손수 써주었다.
19)
조극선은 부친에게 수학을 시작하였고, 15세되던 1609년에 이명준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후
1617년(丁巳: 23세) 봄에 중광초시에 입격해 서울로 복시를 보러 갔다가 무질서한 과장의 질서에
그의 각별한 지도아래 『당음(唐音)』,
26)
『시가연해(詩家淵海)』,
27)
『마사(馬史)』,
28)
『두시(杜詩)』,
29)
『산곡
실망하여 고강시험을 포기하였다. 그해 12월에 강화인 최찬(崔贊)의 딸을 신창(新昌)에서 맞았다.
시(山谷詩)』
30)
『맹자(孟子)』,
31)
『한문(韓文)』,
32)
『주역(周易)』
33)
등을 읽었다. 24세 때에는 이명준의 소
1618년(戊午: 24세)에 4월에 이명준이 써준 편지를 가지고 당시 신창에 우거하여 있던 잠야 박지계
개로 박지계와 사제의 의를 맺고 『대학』
34)
과 『근사록』 등을 학습하였고, 겨울에는 역시 이명준의 주
를 찾아뵈었다. 조극선은 이때의 상황을 일록에 “자신이 병진년(1616) 겨울에 이명준을 적소인 영덕
선으로 조익과도 사제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 조극선은 학문적 온축을 위해서 독서에 열중하여 당
에서 뵙고 돌아올 때에 선생께서 박지계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었으나 연고가 있어 늦어져 지금에
시 조선 선비들의 일반적인 독서처 이었던 와사(瓦寺)
35)
초암(草菴),
36)
대사(大寺)
37)
등의 사찰과 송정
야 찾아뵙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때 박지계는 이명준의 안부를 묻고, 조극선이 배움을 청한
(松亭),
38)
서당, 향교, 정자 등과 친족 및 친구들의 집에서 독서를 하였다.
39)
것을 재삼 사양하다가 허락을 하면서 『근사록(近思錄)』과 『사서(四書)』를 먼저 읽되 사서 가운데는
이러한 독서에 대하여 조극선은 일록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특히 1618년 6월 14일이후에는 매
『대학』은 혹문(或問:대학혹문)을 참고해서 볼 것을 권 하였다.
20)
이후 조극선은 자신이 거주하였던
일 읽은 서적과 반복하여 읽은 회수, 혹은 독서하지 않았으면 그 사유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덕산과 신창이 가까운 관계로 자주 박지계를 찾아 수학하였다.
21)
상에서처럼 조극선은 28세까지는 스승을 만나 학습하고, 지식을 온축하기 위하여 독서에 열중하였
같은 해 11월 2일에 조극선은 신창으로 가서 조익을 찾아뵙고, 이명준의 소개 편지를 전해드리고
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사제의 의를 맺게 되었다.
22)
조익은 제자이자 조극선의 친구인 민기수를 통해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어서 굉장히 기뻐했다. 조익은 조극선에게 “학자는 마땅히 공맹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며, 공맹의
유법(遺法)은 오로지 사서(四書)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조극선은 이명준, 박지계, 조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현의 학문을 준거로 삼게 되었다.
23)
박지계와 조익이 우계학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학자이었으므로 조극선도 우계학통의 계
24) 김학수, 앞의 글, 12쪽. 
25) 김학수, 앞의 글, 13쪽. 
26) 『인재일록』 기유(1609), 12월 3일조. 
27) 『인재일록』 경술(1610) 3월 19일. 
28) 『인재일록』 신해(1611) 2월 22일. 
29) 『인재일록』 신해(1611) 5월 13일 
18) 『冶谷先生集』 권11, 연보, 계축조. 
30) 『인재일록』 신해(1611) 8월 13일: 산곡시는 송나라 때 시인인 黃庭堅의 시이다.(안정은, 「『인재일록』을 통해 본 야곡 조극
19) 『인재일록』 戊午(1618, 광해군10) 十月 十八日 辭歸【先生言趙修撰翼?朴洗馬知誠之爲人 可以游學于其門 修書以通 且以
선의 수학기 모습」, 『한문학보』 31권, 2014) 
二尾廣魚?一尾大口魚 使歸供于庭? 親送至門 握手贈言 又使人將之于路矣】遂行掉?于知品院 宿角山驛 風寒 
31) 『인재일록』 병진(1616) 11월 16일. 
20) 『인제일록』 戊午(1618, 광해군10) 閏四月 二十二日
往謁朴洗馬先生【先生 名知誡 字仁之 寓居于縣小東面水餘
32) 『인재일록』 병진(1616) 12월 5일. 한문은 당나라 문장가 한유의 시문집인 『韓文公集』으로 보인다. 
里 以道學聞名 曾在丙辰冬 自盈德還時 先生爲之修書便 余往學 有故且遷延 到今不敏如何 (중략) 今始往謁門下 與基甫
偕至 則沒徑蓬蒿野庄蕭然 待客無所庶乎蒼頭家 以見之 旣卽席奉進潛窩先生書 ?以未能趨時來現之意 先生詳問潛窩安
33) 『인재일록』 무오(1618) 7월 19일. 
否 論文及韓文乃出韓文集 使余言潛窩所選目錄曰 將敎兒子時 文而他書 無可者 此惟朱夫子所考異 可使讀之 余乃請所
34) 『인재일록』 정사(1617) 3월 11일. 
學先生 再三辭讓 余固請然後曰 近思錄·四書之階梯 宜先讀之然後 四書則先觀大學 而以或問參看也 ……】 
35) 『인재일록』 임자(1612) 12월 1일. 
21) 『인재일록』 무오(1618) 윤4월 25일. 5월 24일. 6월 2일, 11일, 19일. 7월 10일. 9월 1일 등이다. 조극선은 일록에 그날
36) 『인재일록』 을묘(1615) 11월 27일. 
수학한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길게 기록해 놓았다.,
37) 『인재일록』 무오(1618) 6월 16일. 
22) 『인재일록』 1618년 11월 2일. 謁趙修撰先生于什菴【早朝 叔丈季氏來見 且言趙修撰方在于什菴 而有今日出遊之奇 吾則朝
將往見云……乃與偕行 到什菴 謁于趙修撰 傳以潛窩先生書 書云 數年音信斗斷 盖緣吾兄捲歸鄕曲 悠悠景仰之情 少須
38) 『인재일록』 을묘(1615) 6월 17일. 
臾不忘耳……余且留宿 同侍修撰先生宿者 乃兩玄?李震復?子必也】 
39) 『인재일록』 을묘(1615) 4월 12·23·29일. 윤8월 3일. 9월 11일. 10월 18·29일. 그리고 23일에는 온종일 독서하기도 하
23) 『야곡집』 권11, 연보, 무오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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