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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기 효자 정려>
<강이기 효자정려 현판 일부>
[3] 강인수
姜麟壽
< ? ~ ? >
조선 중기 선조 때의 효자로서 본관은 진주(晉州)다. 중종
(1506~1544 재위) 때 아버지 감( )과 어머니 전주(全州) 이
(李)씨 사이에 외아들로 송악면 동화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봉
암(鳳巖)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
송을 받았다. 부친이 병환을 앓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간병했
다. 특히 한겨울인데 수박이 먹고 싶다는 부친의 말씀에 천지
사방을 헤매고 다니던 중 마른 수박덩굴에 수박이 하나 달려
있는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드리니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그 후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여막(廬幕)에서 3년을 시묘하며
<효자 강인수 정려>
지냈다. 이런 효행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선
조38년(1605)에 현재의 아산시 송악면 동화2리 서봉골 입구에 정려를 세웠고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정
려는 현재까지 잘 전해지며 주변을 정문거리라고 한다.
[4] 권대평
權大平
< ? ~ ? >
조선 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안동이다. 감찰 지(芷)의 손자이고 효행으로 주부에 추증된 형(泂)의 아들이
다. 아산현 남면 금곡리(현재 염치읍 방현리 쇠일)에 살았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고 부모가 돌아
가시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지켰으며 전후의 부모상에는 세 번이나 손가락을 끊
었다. 3년 상을 마치고는 새벽마다 사당에 나아가 배알하기를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온천에 행행했을 때 고을 유림의 종장 이지강(李之綱)이 그를 포함해서 효자 김효일(金孝
一)·홍절(洪 )·이덕민(李德敏)과 열녀 막개(莫介) 등‘4효1열(四孝一烈)’
의 포상을 요청한 상소를 올렸
다.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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