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28페이지

84페이지 본문시작

저 경기감사 김우형의 행차에 길가에 각 읍사(邑使)가 호송하고 진위 현령 이집성이 병환인
데도나와그정성이그르치지않는것이없더라.
수원부사 성후설은 음식을 풍족히 하였고 동헌에 장막을 설치하여 야외까지 멀리 보내
었다. 구택(성선생구택)에 오리 정도 이르지 않해서 선생 황고(성선생 당시 임금을 존칭한말) 총관공
묘소가 노방에 있어 선생이 순절할 때 같이했다(성선생의 부친 묘소를 말함). 드디어 대청 안으로
들어가니 북벽에 남면하고 민감사가 일찍이 비석을 세우고자 한 그 앞에 먼저 집을 세우려
했으나 아직 마치지 못하여 열지 못하였다. 기다렸다가 이에 정묘일에 대제를 올리니 본주
목사(홍주) 이섬이 초헌관 면천군수 민윤 또한 외척으로 아헌하고 종헌에 조장령 그 나머지
는 제생이 청에 엎드려 각위하고 슬프게 울었다. 이것이 누가 시켜 그렇겠는가. 지나침도
없고서로기약도안했는데자연히그렇게되었다.
내가 여기에 특별히 감격한 바라 노능(魯陵)의 변을 영월에서 당하여 노산군을 죽여 노방
에 버리고 사람들은 거두지를 못하였다. 그 군의 아전인 엄홍도가 홀로 가서 곡하고 관에
거둬 염습하고 장사 지내니 지금의 이른바 군왕총 이라하고 열성(列聖)에 제사를 올리는 것
이 이 때문이다. 고로 음애(陰崖) 이선생 기록에 이르기를 자고로 충렬지사는 반드시 권문세
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임금을 팔고 그 이를 꾀함에 그 임금이 참화가 있은 연
후에 마음에 유쾌한 자가 있으니 엄홍도는 보건데 어떠한가. 촌부나 아동이라도 앙울한 마
음과 불평에 이르러서는 그 말을 입에 내는 것을 알지 못하나 과연 인성을 속이기는 어렵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연석에 엄홍도를 녹권에 기록하고 포상하라고 청하였
다. 지금 선생의 신주를 엄의룡 에게 얻어 엄씨의 집에 봉안(임시봉안) 하였다. 이것은 다 영
월일로부터시작된것이다.이것역시기이한것을알지못하겠노라.
노능군신(魯陵君臣)에 다행인 것이다. 또한 제 엄씨들도 다 다행한 일이다. 이로 인하여 볼
때 박참판 종현이 미산에 있는 자이니 병자년에 선생과 부인 김씨 신주를 써서 종들과 안
고 가서 제사를 지내다가 그가 죽으니 그 신주가 참찬댁에 있다가 참찬이 또한 자손이 없
어 다 같이 땅에 묻었다고 하니 그것 증험함이라. 부인 묘소는 지금 노은동에 있어 향화가
끊어졌다. 오호라 그 또한 비통하도다. 서울 외 제생들이 또한 장차 사당을 구택 곁에 짓고
그 때의 동지(박팽년, 하위지, 이개유, 성원, 유응부) 오선생을 아울러 향사를 했다. 세조대왕이 일찍
84_홍성의금석문

84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