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94페이지

83페이지 본문시작

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야곡 조극선의 생애와 『인재일록』·『야곡일록』의 의의
3.조극선의생애
곤은 흥무(興武), 흥인(興仁), 흥의(興義) 3남을 두었는데, 흥무(1532-1589)가 조극선의 조부이
12)
다. 흥무의 자는 중한(仲?)이고 관은 창신교위(彰信校尉)이었다. 흥무는 어려서 병을 앓아 학문에
힘쓰거나 과거에 응시하지는 못하였지만 경제적 역량이 탁월하여 가세를 크게 늘렸다. 흥무는 인품
1) 학문의 수학과 온축기
또한 넉넉하여 재물을 인색하게 다루지 않았고, 가난한 인척들을 구제하여 인심을 얻었다고 한다.
조극선은 1595년(선조 28) 2월 28일에 충청도 덕산현 대야곡면(大冶谷面) 야곡리(冶谷里)에서 아
흥무의 경제력은 이후 조극선의 학문과 사회적 성장의 밑받침이 되기도 하였다.
10)
버지 경진과 어머니 공주이씨 사이에 출생하였다. 7세에 부친에게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문자를 불
흥무는 경린(景璘), 경진(景璡), 경원(景瑗), 경유(景瑜) 4남과 밀양인 박안행(朴安行)과 혼인한 1
러주면 곧바로 암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부지런히 공부하여 9세에 사략(史略) 7권을 읽을 정도로
녀를 두었다. 흥무의 2자 경진이 조극선의 부친이다. 경진의 자는 백헌(伯憲), 호는 매명(梅鳴)이었
일찍이 문리를 달성하였다. 선생도 스스로도 평생문리를 10세전에 얻어 이후 특별히 더해진 것은
다. 경진은 집안의 학문적 분위기를 진작시키었다. 그는 선비 전유륜(全有倫)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
없었다고 하였다.
13)
념하였고, 스승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두 동생을 지도할 정도로 문예가 성숙하였다고 한다. 향학
부친에게 지도를 받던 조극선이 본격적인 학문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1609년(기유:15세(己酉:
열이 남달랐던 그는 집안에 없는 책은 직접 베껴서 외웠고, 그런 정신은 일생토록 변함이 없었다.
15세)에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1572~1630)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면서 이다. 이때 이
그의 공부에 대한 미담은 주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지
명준은 덕산현감으로 있으면서 학교 중흥에 힘써 매달 초하루에 동몽들을 경내에 모아 놓고 친히
만, 학문을 바탕으로 중년이후는 후진양성에 매진하여 많은 문인을 두었다. 문인들은 힘을 합처 서
점수를 주었는데, 극선의 기모(氣貌)를 보고 그 자질을 중히 여겨 날마다 와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
당을 건립하여 학업과 유식의 장소로 활용함으로써 덕산 대야곡 일대는 호서사림이 주목하는 학술
해 12월에 조극선은 종형과 함께 이명준에게 『다음(唐音)』을 배웠다.
14)
조극선이 스승 이명준을 만
적 공간이 되었다.
11)
난 것은 그의 학문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그래서 조극선은 이명준을 만나 학문하는 큰 방도
이상에서처럼 한양조씨가는 조선 건국 후에는 개국·정사공신으로 한양에서 중앙관료로 세거하
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수업을 하는 틈틈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일이나,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
였다. 조극선의 6대조 증이 처가인 영덕 김씨가의 터전이었던 홍주 녹운동에 입향하여 충청와 인연
스승을 공경하는 일 등으로 일록(日錄)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15)
을 맺게 되었다. 이어서 조극선의 증조부이었던 곤이 홍주 노은동에서 그의 처향인 덕산의 대야곡
1611년(辛亥) 2월에 이명준은 덕산현감에서 물러나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조극선도 따라가
으로 이거하였다. 이후 덕산 대야곡은 곤의 자손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으며 조극선도 이곳에서 생
여덟 달을 머물면서 『사기영선(史記英選)』 등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
이 시기 조극선은 서울에 머물
장하였다.
면서 선생을 찾아뵙고 수학한 사실을 일록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명준도 조극선이 공부하러오면
매번 식사를 같이하였고, 한 달여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지극한 애정을 베풀었다.
17)
1613년(癸丑:19세)에 이명준의 서제(庶弟) 이경준(李耕俊)이 박응서(朴應犀)의 옥에 연루되어 사
12) 조극선의 생애는 다음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연보(『冶谷先生集』 권11, 부록)와 행장(『약천집』 권22, 행장): 『조선왕조
실록』, 『승정원일기』: 김학수, 앞의 글: 안정은, 「冶谷 趙克善의 『忍齋日錄』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논문, 2013). 
13) 『야곡선생집』 권11, 연보. 
14) 『인재일록』 기유(1609), 12월 3일조 
15) 『야곡선생집』 권 11, 연보. 실제로 조극선의 청년일기라 할 수 있는 『인재일록』의 첫기사가 “기유(1609, 광해군 1) 十二月
初三日與從兄始學唐音于地主李侯【諱命俊 字昌期】每日入學 【曾自夏間 隨諸學徒 每月朔望 入縣考講 自此 吾二人得親受
學 後李紘?全海龍 亦親受矣】”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16) 『인제일록』 辛亥(1611) 2월 22일조. 
10) 김학수, 「17세기 호서의 지성, 야곡 조극선」, 『아산유학의 여러모습』, 외암사상연구소역음, 지영사, 2010) : 『冶谷日錄』
17) 『인재일록』 辛亥(1611) 九月 晦日 朝返【在京時 先生恩撫至大 若往學之日 則朝往則供朝食 午往則供中飯 暮往則供夕食
影印本 1, ‘해제’(한국학중앙연구원, 2012)에 재록. 본고 ‘해제’로 수록된 글을 참고하였다. 
如是者數矣 非但於我也 先生家用常不繼 而七月俸祿 輒多散與窮乏者 李丈亦愛我 至於月餘留置其家 下鄕時 以人馬率來
感極 玄兄?而混 亦爲我無衣 解一布衣以衣我】 
11) 김학수, 위에 글, 10쪽. 
82 ?
? 83

83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