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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생신주천봉기
금상(今上) 임자 4월 일 서울사는 한 선비 남택하 장시헌 여필관 3인이 글을 가지고와 말
하기를 모월 일에 호주이(호조관리) 엄의용이 와서 고하길 성모(성삼문) 신주가 인왕산 붕애 사
이에 있다하니 우리 등은 놀라고 기이하여 급히 가서 보니 절벽아래 어지러이 있는 바위
사이에 옹기그릇 속에 세 개의 밤나무 신주가 있으니 그 하나가 과연 성선생이라. 먼지를
닦아내고 살펴보니 앞면에 정자로 성명 삼자 및 무술년생 네 글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빠
진 자와 같이 다만 보 라는 한 글자가 있었다. 앞면과 뒷면이 13자였다. 우리 등은 마음이
놀라 신주를 펴고 절을 올렸다. 그 나머지 둘인 즉 성선생의 외손 참찬 박호 부부라고 쓰
여있는 즉 하나같이 가례(家禮)의 법으로 하였다. 우리 등은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고 집
으로 돌아와 구가(성선생의 구가)에 안치를 해야 하나 장차 어떻게 해야 마땅한지 알지 못하다
가 내가 깨닫지 못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조 병자년이 지난지가 대개 수백년이라.
비록 당시에 현양(顯揚)한 자는 소리를 침잠하여 고요하지 않음이 없으니 귀신인들 영명(寧
明)치 못하였다. 하물며 선생이 음형참화 여파로 누가 이 신주를 만들고 제사를 올리며 묻
었으며 지금에 나왔는가. 예로써 친히 다하고 부조묘(조정에 내린 사당으로 불천지묘를 말함)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선생이 장절고의로써 마땅히 백세에 이를 제사를 올리려 하되 제사
절사한지가몇년인가.
지금 이 일은 대개 또한 하늘이 엄이(嚴吏)를 끌어내었으니 속으로 이와같이 기이하고 다
행한일이라.
무릇하늘이이미열어놓고사람이또묻었으니어찌참을바요.
일찍이 민감사(閔監司)로 인하여 선생의 구택이 홍주 노은동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당시에
마당과 오동나무는 없고 지금 임시로 이곳에 봉안하니 이는 예로 신주를 집에 다시 들여오
는 것이다. 비록 시작은 하였으나 지금 와서 행하게 알리고 또한 남씨와 여씨 제인은 일이
어그러지지 않게 함이 다행이다. 곧 선생의 친족이 홍주에 있어 통지하고 신여(神輿)를 선생
의 먼 생질 엄찬의 집에 임시 봉안하니 이에 진신장보들이 가서 참배하고 전장령(前掌令) 조
세환은 외척이라. 유학 김근 은선생의 외족이라 홍주로부터 서로 엄씨가에 이르러 받들기
를 도모하고 남으로 간 병조 판서 민공 정중이 장차 관학제생을 거느리고 강두(江頭)에서 배
송할 적에 결말내지 못한 공사로 간다고 하다 계해년 오월에 조와 김이 수행을 하였다. 먼
홍성의금석문_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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